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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에 습지 소래 습지를 찾아서

소래 습지 기행

그 겨울에 습지
소래 습지를 찾아서

이 도 연

하늘과 벌판이 열린 텅 빈 적요 위로 십이월을 이틀 남긴 바람이 세월을 밀어내고 있다.
소래 갯골생태공원의 겨울은 멀리서 보면 황량하고 차가운 바람으로 가득했으나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면 황량함 속 위로 얼비치는 무한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고 갯벌이 품은 자연의 오묘함과 때로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 오밀조밀 모여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날씨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한겨울의 추위가 살짝 누그러져 봄 햇살처럼 따사롭게 맑은 빛으로 부서진다.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아스팔트 길 위만을 걷다 흙길을 걸으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고운 모래가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이 곱디곱고 얼었던 흙의 표면이 촉촉이 녹아내려 살포시 걷는 발걸음 뒤 끝에서 사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먼지 한 점 일으키지 않는다.
해풍에 실려 오는 짭조름한 갯내음이 코끝에서 맴돌다 이내 무디어진 감각에 저만치 사라진다.

갯골이 하구로 가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물길을 따라 바닷물이 드넓은 갈대밭을 적시며 들어오는 풍경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어 있는 자들의 중간쯤이랄까!
밀고 당기는 밀물과 썰물, 산자와 죽은 자 들의 대화처럼 알 수 없는 웅성거림으로 바람을 밀고 물을 밀어 갈대밭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까지 길을 만들어 간다.

저물어가는 낙조의 시선을 따라 밀려드는 밀물의 등 위로 반짝이는 물비늘은 눈이 부시도록 황홀하고 잔바람에 일렁이며 빛을 튕겨내는 작업은 그들만의 업인 듯 숙련된 장인조차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늘이 만들고 땅이 빚어내는 자연의 섭리를 감히 그 어느 장인인들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무아지경 감탄하며 멍때리는 것이 고작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전부다.

갯골을 따라 가지런하게 나아 있는 길가에 한 시절 풍미하며 콧노래가 절로 나왔을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길이 이백여 미터 이어진다. 붉게 물들던 열매가 겨울바람에 말라가도 봄이 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생명이 피어날 소우주를 품에 안고 침묵 중이다.

해당화 길이 끝나는 지점에 검은 강을 건너 도시와 습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걸려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선죽교나 해탈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 건너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세상에 이르러 모든 잡념과 세속에서 묻혀 가지고 온 욕망과 위선 질투 오욕 칠정을 바람에 날려버릴 것 같다.
황량하고 쓸쓸할 것 같은 겨울 바다를 품에 안은 이곳 풍경의 적막과 고요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 모른다.

다리를 건너면 가까이 만나는 갯벌 체험장
갯골에 숭숭 뚫린 구멍이 누구의 작품이던가? 작은 앞발로 갯벌을 파헤쳐 먹거리를 걷어 올리고 기형적으로 커다란 발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내가 제일이야! 소리치며 당당하게 누비던 농게의 흔적은 이솝우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 많던 농게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자신의 존재를 구멍으로 대신하고 게들도 동안거에 들어가 참선 중인가 보이지 않는다.

농게의 흔적을 따라 눈길을 여기저기 돌리다 보면 어느새 평평하고 반듯한 사각형 염전이 나오고 염전 옆으로 소금 창고가 아주 오래된 유물처럼 늘어서 있다.
줄지어 늘어선 운반용 협궤 열차가 드나들었을 철로가 그리다 지워버린 붓칠처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소금창고의 풍경은 이미 오래전에 증발하고 없는 타인의 흔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저런 건물이 있었나, 생경하지만,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는 풍경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염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낮의 태양을 바닷물에 가두어 놓고 자신의 몸에서 증발하고 땀 속에서 녹아내린 소금의 결정을 걷어 올리는 염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시선을 붙잡아 태양에 그을려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소금 창고와 겹친다.
땀으로 절은 옷자락에서 만들어진 짜디짠 소금이 달고 단 음식이 되어 밥상을 풍요롭게 했구나! 염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동맥 같은 힘겨운 노동의 노고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염전의 끝자락 울창한 갈대밭 위로 바람을 가르는 풍차가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며 삼 형제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나란하게 서 있다. 풍차의 발아래 갈대 무리가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것이 좌에서 우로 앞에서 뒤로 춤추는 모양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소래 생태습지 여행의 매력은 갈대가 울창해서 미로가 시작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황갈색 갈대 사이에는 슬그머니 기어가는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길이 이어지고 중간에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 심어진 곳에는 쉼터가 있어 여행자의 발길을 위로한다.

갈대밭 안부 깊이 미로 같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마치 다른 행성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세차게 갈대숲을 밀어붙이면 갈대숲은 바스러질 것같이 말라버린 몸에서 아주 오래전에 풍화된 영혼의 울림이 들린다.
음영이 시시각각 변화하며 만들어 내는 숲의 물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화가인 내가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쉼터 두 곳을 지나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바라보며 어디로 갈 것인가!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순간의 선택을 여러 차례 하고 나서 걷다 보니 삼 층 높이 전망대가 나타난다.
지평선과 하늘이 일자로 침묵하고 있는 드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호수가 갈대숲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망대 위에서 바라보는 갈대와 호수 위를 날아오르는 겨울새들의 군무가 저녁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바람이 양 볼을 비비고 달아나자 붉게 상기된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입김을 불어본다. 이 겨울을 지나가는 나그네 발걸음이 어디에 머물지 모르지만,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며 신이 빚어 놓은 자연의 경이 앞에 고개 숙여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유하고 교감하는 공간에서 또 한 계절이 가고 또 한 겨울이 간다.
봄이 오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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