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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베드로 길을 걷는다

이승훈길 기행

이승훈 베드로 길을 걷는다

이 도 연

게으름과 호기심 사이를 자로 재며 부지런함을 떨어 바람에 문을 흔들며 집을 나선다.
정오는 한낮의 태양을 배경으로 하루의 중심축을 어제와 다름없이 넘어가고 있다.
12월 중순 날씨가 매서운 찬바람을 몰고 다니며 양 볼을 얼얼하게 스치고 지나는 추위에 고개를 움츠리게 한다. 그래도 오늘 작심은 길 위를 걷고 있다.

얼마 전 인천대공원역 앞 도로에서 보았던 표지판에 이승훈 베드로 길이라는 문구를 의아하게 한참을 쳐다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여기가 왜라는 의문부호를 만지작거렸다.
이승훈 베드로가 누구이던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로 조선에 복음의 씨앗이 되어 정조가 승하한 이후에 발생한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인물이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인천대공원역에서 만수역으로 이어지는 직선거리 약 1801km 구간을 베드로 이승훈 길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부평시장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또 한번 인천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하는 수고로움을마다 않고 인천대공원역에 도착한다.
오늘 탐방 여정은 베드로 길의 숙제를 풀고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서부터 발걸음을 시작한다.
버스 정거장 옆 새움 간판이 이곳에서부터 이승훈 베드로 길임을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관심 밖으로 외면하며 스쳐 지나가다 사진을 찍는 필자에게 오히려 이게 뭐지요? 하고 물어온다.
표지판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제 갈 길로 겨울바람을 몰고 지나간다.
아는 만큼 보이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을 실감한다. 현실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필요한 것만 본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평상시 같으면 인천대공원으로 향했을 발걸음을 만수역방향으로 들머리를 잡는다.
대공원 담장을 끼고 천천히 십여 분 걸었을 때 즈음 깔끔한 광장에 베드로 이승훈 공원이 보인다.
잘 단장된 공원 건너편에 이승훈 베드로 성지 기념관이 보인다.
멋진 건물에 비해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의아스럽다는 느낌은 잠시 후 의문이 풀렸다.
기념관 현관을 밀고 들어가자 관리인 한 분이 나오셔서 내부 사정으로 아직 개관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쉬움 움에 길게 한숨을 쉬었지만. 건물과 각종 조형물은 공사를 마친 상태이고 산 능선 위에 이승훈 묘지가 안장되어 있어서 건물을 돌아보고 이승훈 묘지를 참배하기로 마음먹었다.

상아색으로 지어진 기념관은 주 건물을 중심으로 앞마당에 동그란 원형을 그리며 지어서 마치 하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고 외벽을 따라 올라가 이층에서 바라보는 원형 안에 담겨 있는 하늘 풍경은 아름답고 성스러웠다.

건물 뒤쪽 산으로 향하는 500여 미터 길고 긴 십자가 길로 이름 지어진 나무 계단이 있다. 그 끝에 이승훈 묘가 남향을 향해 만수동 들녘을 바라보며 누워있다.
계단 초입에서 바라보는 겨울 산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성글하고 헐렁한 갈색 숲에 잡목이 서로 기대여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텅 빈 여백 사이로 유일하게 강렬한 불꽃으로 삶의 열정을 보여주는 산수유 열매는 더없이 붉게 생명의 환희를 불태우듯 토실하게 삼삼오오 매달려 있다.
겨울 숲속 잿빛 공간에서 불꽃놀이 하듯 존재 인식에 희열을 느끼며 새파란 하늘에 경계를 넘어 빛나는 생의 아우라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붉은 열매가 마지막 낙하를 해도 봄이 오면 제일 먼저 황량한 숲에 노란 꽃을 피우고 초록빛 열매를 맺어 윤회의 삶을 살아낼 터이니 붉음이 시든다 해서 서럽지 않다.

굽이치며 평지와 계단을 오르는 십자가 길옆으로 일정한 공간에 저녁노을을 튕겨내는 황동 빛 부조물(浮彫物)은 고난의 예수님 순교 여정을 순서대로 아로새겨 놓았다.
누구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 고난이던가?
죄지은 자 대신해 짊어진 무게이며 용서와 사랑의 순교 이 건만, 아직도 세상은 시끄럽고 날카로운 말과 독설이 난무하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불편하고 마음은 쓰리고 아프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듯 보이는 사람들의 성호가 십자가 길에서 만나는 성스러운 예식으로 찬 겨울바람을 훈훈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어떤 이는 부조물을 정성스럽게 닦고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를 한다. 예수님 흉상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순간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의 끝에 이르러 자그마한 봉분과 묘비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 선각자 평창 이공 베드로 승훈 지묘(韓國 天主敎 先覺者 平昌 公 베드로 承薰 之墓)라는 묘비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1756년 인천부 조동면 장수동에서 출생한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가 되었다.
그는 25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그의 아버지 이동욱이 중국의 동지사 서장관으로 떠나는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인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그라몽 신부에게 받게 된다.
이후 조선에 돌아와 정조 9년 서울 명동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를 창설하여 정기 미사를 하고 교리를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신앙적 삶은 순탄치가 않아서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적발되어 곤욕을 치르다 천주교는 허황하고 대중을 혹세무민한다 말하며 배교를 선언하였으나 이후 천주교 지도자적인 인물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힘을 쓴다.
1790년 음서제를 통해 평택 현감을 지내던 중 제사를 금한다는 교황청의 명을 듣고 또다시 천주교 배교 선언을 한다.
평택 현감을 지내면서 향교에 배례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삭탈관직을 당한다.

친교와 배교를 번갈아 가며 신자의 삶을 영위하였으나 결국 신유박해(1801년) 당시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쓸쓸하게 참수형을 당한다.

그의 유골은 훼손이 심해 진토가 되어 수습할 수 있는 유골은 경기도 광주군 천진암 성지에 안장하고 남아 이곳은 육신이 진토 되어 있는 진묘(眞墓)이다.
종교적 이념과 살고자 했던 인간적인 갈등으로 번민했을 그의 무덤 앞에 진심어린 참배를 한다.

신앙을 떠나 우리나라 종교계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 앞에 선각자라는 호칭은 당연한 귀결점인 것이다. 이승훈 무덤 아래 소박한 무덤 두 개가 더 있다.
장남 이택규 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삼남 마티아 이신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손자들조차 병인박해(1868년) 때 함께 순교하여 지금 인천역 제물 진두 성지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순교도 대물림 이런가! 이름 모를 아픔이 여울이 되어 가슴에 새파란 멍울이 맺히는듯하다.

겨울 찬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목덜미를 시리게 파고든다. 종교와 이념은 무엇인가? 사람을 굳건하게 만들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정신세계에 삼가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잔뜩 흐려진 하늘에 노을이 고이고 손으로 찌르면 눈비라도 내릴 듯하다.
언제인가 이 땅에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고 꿈꾸던 천주 세계가 열리고 사랑과 자비가 흰 눈처럼 펑펑 내리기를 염원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따끈한 차 한 잔이 생각나는 저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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