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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지성 Jun 02. 2023

이해의 착각: 앎이란 무엇인가? '실재에 이르는 길'

인식론과 상대성이론, 실재론과 양자역학

    본 글의 제목 중, 일부는 로저 펜로즈 저 <실재에 이르는 길, The road to reality>에서 따온 것 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구인데, 필자의 학문적 가치관을 간단하게 함축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학부 시절 건축공학을 공부하다가 졸업반에 이르러서야 전공을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고, 결국 현재 대학원에서는 이론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건축에서 물리학으로의 전향이라는 다소 특이한 이력은 듣는이에게 궁금증을 자아해낸다. 이 간극을 매끄럽게 설명하는 것은 평생의 숙제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았던 학부시절, 연구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얻었다. 데이터를 이용한 도시재생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연구의 시작은 항상 ‘이상적인 도시 모델의 가정’이었다. 연구진은 이상적인 도시 모형으로, 공공서비스와 대중교통이 주거지에서 도보가 가능한 반경 내에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또한 지속가능한 도시 모형으로는 대중교통을 기준으로 도보가 가능한 거리에 공공서비스와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는 형태를 가정했다. 물론 근거는 존재한다. 한국 정부의 정책과 OECD 관련 자료들이 주 근거가 되었는데, 과연 이러한 도시의 모형이 인간이 영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모형인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힘들다. 특정 상황 및 기준에 따라 수도 없는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언제나 합리성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제기될 수 있다.


특수과학의 한계?

Foder: irreducibility of special sciences[1]

     Jerry Foder는 그의 저서 <Special Sciences (Or: The dis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es>[2] 에서 특수 과학(special sciences)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특수과학은 근본적인 물리학을 제외한 타 과학 분야들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예: 화학, 생물학, 신경과학, 공학 등.) 여기서 가능한 논의의 범위는 광대하나, 일단 편의를 위해 특수과학이라는 용어만 가져오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연구의 문제는 특수과학의 학문적 특성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한계이다. 보다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특수과학에서는 경험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연구자가 가정하는 도시의 이상적인 모형에 대해 보편적, 객관적,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이상향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경험적 지식의 판단을 통해 유추하고, 끝없는 수정을 이어나갈 뿐이다.

*연구의 복잡성을 말한다기 보다는 단순 개체에 대한 복잡성을 말하는 것이다. 도시 단위에서 원자의 개수를 생각해보자. 물론 도시가 원자 단위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불가능성이 시스템의 복잡도를 표명하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아낼 수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추론에 앞서서 인간이 지식을 이해한다는게 어떤 것인지, 앎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탐구하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인지하고 있던 앎의 대한 인식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필자는 보통 이 파괴의 과정을 나무라는 사물을 통해 사유해본 경험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나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개념인 나무라는 것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다음 사진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나무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이 3개의 사진 중 나무인 것과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예상한다. 깊이 생각하다보면, 어느정도의 길이까지 자라는 것을 나무라고 칭하는지 혹은 나무를 구별하는 정확한 생물학적 매커니즘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 사실 나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도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는 식물의 분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라는 것은 인간이 경험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유사성에 따라 분류해 명명한 이름에 불과하다. 즉, 인간의 경험이 관념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의 경험이 불완전하거나 혹은 새로운 경험의 유형이 등장하면 흔들리기 쉬운 앎의 형태이다.  


     여기서 앎에 대한 본질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면 성공이다. 필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개념조차 확실한 앎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잠시 괴로움(?)에 빠졌다. 과연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지식은 무엇인가? 혹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언제든 다시 변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는게 없는 것 같다는 무지의 마음이 들었다. 절망은 잠시 접어두고 실재적인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학문적 방법을 택해야하는지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앎과 인식론

     본격적으로 앎에 대한 깊은 사유를 시작한 것은 철학의 인식론(epistemology)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경험주의적인 앎(empiricism)의 반대의 입장으로 합리론(rationalism)의 견해가 존재한다. 합리론은 진리의 기준은 감각에 기반한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합리론의 창시자 격인 데카르트는 '대상을 인식하는 틀'과 '실제 존재하는 물질계'로 나눠 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곧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의 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사유하고 규정지은 관념들이 물질계의 특정 공간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것을 '연장성'이라 한다. 합리론에선 이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는 독립적인 관계일 뿐, 서로의 연결성에 대한 규명이 불가능하다.

칸트의 인식론[5]

     여기서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 의하면, 경험론과 합리론은 통합이 가능한 사조인듯 보였다. 그는 선험적(a priori)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경험에 좌우되지 않고 이미 주어진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분석판단의 예시로, "삼각형은 세 각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다."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경험적 인식과 상관없으며 명제 자체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험적 분석판단으로 연산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한다. 


    하지만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식 체계가 미리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인식의 체계를 '감성'이라고 칭한다. 칸트는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 이전에 선험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를 선험적 감성형식이라 칭한다. 선험적 조건을 찾기위해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보다 앞서 가지고 있는 인식의 체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칸트는 어떤 사람이던 동일하게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선험적 감성형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채택하였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준을 가지게 하는 보편성을 가진 개념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후속편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이는 바로 뉴턴의 관점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인 개념으로 판단했는데, 이는 우리 인간의 인식 체계로 생각해보았을때 굉장히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우리가 새벽에 지구 건너편에 있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더라도, 그 경기와 내가 관람하고 있는 사건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임이 틀림없다. 단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인간 체계로 구분할 뿐, 그 두 개의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 또한 우리는 모두가 같은 3차원 공간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한국에서 직선의 개념은 미국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체계와 들어맞는 칸트의 통합론으로 합리론과 경험론이 부분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형상화한 이미지 [4]

      아인슈타인의 등장으로 칸트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시공간의 대한 개념이 부정되며, 칸트의 인식론 체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며, 관찰자의 기준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공간은 변형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상대성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수학은 바로 비유클리드 기하학(리만 기하학) 인데, 이는 선험적 분석판단의 예시로 들었던 삼각형의 정의를 뒤흔들게 된다. (상대성 이론 편에서 상세하게 서술할 예정.)


     결론적으로 상대성이론은 합리론과 경험론 어느 곳에 서는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할 당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실험은 없었다. 약 100년이 지나서야 상대성이론을 거의 온전히 증거하는 실험들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합리론에 의거해 순수 사고만으로 앎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의 개념을 부정하긴 하지만, 관성의 법칙과 광속불변의 법칙 등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물리법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칸트의 일차적 통합론이 실패하며, 실재에 이르는 길은 아직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뉴턴의 시공간의 절대성 개념이 칸트의 인식론의 토대가 되고, 다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그 근간을 파괴하는 것을 보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근본적인 물리학 이론이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직관과 어긋나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로, 인간의 인식론을 크게 뒤흔들고 확장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경험론이 되었건, 합리론이 되었건 혹은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 되었건 간에 철학적 사유와 앎의 판단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고, 실재에 이르는 길에 확실한 이정표를 제공한 근본적인 물리학의 이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재론

     이쯤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려 한다. 과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이 과연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관념 상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가? 인간이 인식하는 어떤 대상이 주관의 인식 작용과는 독립된 외부에 세계나 자연 따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우리가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실재론(realism)에서 다룰 수 있다. 이는 인식론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는데, 실재론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보편적 사람들이 믿고 있는 상식적 실재론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식적 실재론(소박적 실제론)은 인간이 감각 및 지각 기관을 통해 식별력을 얻고 그를 통해 인지하는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라 믿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각 및 감각 능력은 상당히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인간은 빛의 반사를 통해 물체를 식별한다. 하지만 인간의 원추 세포는 380에서 720나노미터 사이의 작은 범위밖에 탐지하지 못한다. 이는 가시광선의 영역인데, 가시광선의 영역 이외에도 수 많은 파장의 광자가 존재한다. 이것이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체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는 이유다. DNA, 세포, 원자 등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물질을 우리는 왜 실재하는 것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과학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 [6]

     실재론에서는 상식적 혹은 소박적 실재론과 같은 입장만 취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론은 실로 다양한 입장으로 파생되어 각각의 정도에 따라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적 대상이 우리의 관념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과학은 적어도 그 대상에 근접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영역을 실재하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것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과학은 '과학적 대상'과 '관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인 논제를 직접 다룰 수는 없다.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회의로 도구주의(instrumentalism)가 있다. 과학은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학적인 일련의 사건들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도구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현상학적 사건의 본질에 실재가 존재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한다.


     도구주의를 보완하는 입장으로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이 존재한다. 과학은 적어도 어떤 영역에서 세계의 패턴, 구조 등을 발견했다고 보는 입장인데, 이 패턴이나 구조가 세계의 실재에 근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중력이나 맥스웰의 에테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의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그 수학적 구조는 근사적 진리에 접근했다고 보고 그 수학적 구조를 더 근본적인 실재라 판단하는 것이다.


     앞서 인식론의 대한 논의에 근본적 물리학 이론(상대성이론)이 개입했던 것처럼, 이 실재론 또한 근본적 물리의 이론이 형이상학적 층위에 근접하게 도달한 것이 있다. 바로 양자역학이다. (후속 편에 자세히 다룰 예정.) 물리학에서 처음으로 논문에 실재(reality)라는 개념을 들여온 인물이 있는데, 바로 또인슈타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당연한 물리적 실재를 가정하고 이론을 전개해왔기에 굳이 실재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형이상학에 가까운 실재의 개념이 물리학에 도입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아인슈타인이 사용한 실재(reality)라는 단어는 철학적 범주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니기에 방금까지 논의했던 개념보단, 사실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양자역학이 물리적 실재를 뒤흔드는 이론이기에 이를 부정하기 위해 들여온 것이다. 그는 물리적 실재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물리학 이론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양자역학에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7]

    양자역학에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입자는 측정되기 전까지 파동함수라는 확률로(정확히는 확률 밀도) 입자의 위치를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측정되기 전에는 정확한 실재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로, 상당히 대중적인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이 있다.


    슈뢰딩거 또한 양자역학의 이론적 불완전함을 주장하기 위해 위와 같은 사고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사고 실험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양이는 외부와 단절된 박스 안에 있다. 방사성 물질인 라듐이 붕괴할 확률은 1시간 뒤 50%이다. 라듐 핵이 붕괴하면 라이거 계수기가 이를 감지해 그와 연결된 망치를 내려쳐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을 깬다. 고양이는 이 청산가리에 중독되어 죽는다고 가정을 하면, 고양이가 죽을 확률은 라듐이 붕괴할 확률인 50%이다. (사고실험이니 노여워하지 말자.)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8]

     양자역학은 측정 전에 상태는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즉,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관측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말인가. 그렇기에 슈뢰딩거 또한 양자역학을 반박하기 위해 이 사고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확률적으로 중첩되어 존재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물리적 실재라는 단어를 쓴 논문은 EPR 역설이라 불리는 주제를 다룬 논문이다 [9]. (현재까지 무려 23000회 인용.) 이 논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제로 자연이 물리적 실재가 불완전해 확률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한계로 그 이론의 숨어있는 변수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불완전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벨 부등식(Bell's inequality)에 의해 반박되었다 [10]. 즉, 양자역학은 그 자체로 어느정도 완전한 이론이고 자연은 실제로 확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달을 보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당연히 달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선 인간이 달을 보고 있지 않으면 (측정되지 않으면) 달은 그곳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고 답한다. 즉, 여기서 물리적 실재는 관측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 존재할 것 이라는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자연세계가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실재론은 완전히 깨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물리적 실재는 철학에서의 실재가 함의하는 모든 바를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일 뿐, 실제 형이상학적인 개념까지 포함되어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등장이 실재론적 해석들을 표명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난제를 낳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구조적 실재론을 그대로 따른다. 양자역학은 그 자체로 도구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양자 장이론(quantum field theory) 이라는 강력한 수학적 구조를 지닌 이론체계가 설립됨으로써 그 구조적 실재는 근사적으로 아직 유효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마치며

     아직도 오리무중인 결론을 통해 실재에 이르는 길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알고자하는 실재 혹은 그 존재의 여부가 인간이 감각 및 지각기관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어느정도 밝혀진 것 같다. 필자는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과연 어떤 길을 택해야하나에 대한 무수한 고민 끝에 근본적인 물리학 이론을 그 수단으로 정했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가능범위의 한계선을 돌파해 철학적 사조를 뒤흔들고, 실제로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한 판별도 가능케 했던 그 날카로움에 실재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사실 고백하자면, 이 대서사시를 아우르는 모든 철학적 사유를 거친 후에 전공을 정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이브한 관점에서 본 글과 전공선택에 대한 서사는 어느정도 일치한다. 보다 얕은 관점에서 먼저 결정했을 뿐, 지나고보니 필자의 사고과정이 이런 방식으로 구체화 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다.


     다음 편부터는 대망의 현대물리학 이야기가 시작된다. 온갖 철학적 사조를 뒤흔든 흥미로운 현대물리학의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서술할 예정인데, 각각 한 편씩 할애할 예정이다. (지켜질진 모름.) 약간의 스포를 곁들자면, 양자역학은 중력을 설명할 수 없고 반대로 중력을 양자화하고자 하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처럼 서로 정합되지 않는 현대물리학의 이 거대한 두 가지 줄기를 통합하고자 하는 연구 분야가 필자가 속해 있는 분야이므로 필연적으로 각각의 배경 설명이 요구된다.


끝까지 봐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오개념 지적과 토론은 언제나 환영이다.






출처

[1] "Jerry Foder," Sildeshare, https://www.slideshare.net/chadlie_zelop75/jerry-fodor.

[2] Fodor, J. (1980). 6. Special Sciences, or The Dis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 In N. Block (Ed.), Volume I Readings in Philosophy of Psychology, Volume I (pp. 120-133). Cambridge, MA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4159/harvard.9780674594623.c10

[3] "Rationalism vs. Empiric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chive Summer 2015 Edition,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15/index.html.

[4] "시간여행은 이미 일상? 눈치채지 못할뿐," 국제신문,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800&key=20100819.22020210648.

[5] "칸트 철학 그림 설명,"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EC%B9%B8%ED%8A%B8_%EA%B7%B8%EB%A6%BC_%EC%84%A4%EB%AA%85.jpg#.

[6] "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의-과학철학에 있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물의 풍경, https://nanomat.tistory.com/1107.

[7] "슈뢰딩거의 고양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B%A2%B0%EB%94%A9%EA%B1%B0%EC%9D%98_%EA%B3%A0%EC%96%91%EC%9D%B4.

[8] http://afriedman.org/AndysWebPage/BSJ/CopenhagenManyWorlds.html

[9] Einstein, A., Podolsky, B., & Rosen, N. (1935).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ical review, 47(10), 777.

[9] Bell, J. S. (1964). On the einstein podolsky rosen paradox. Physics Physique Fizika, 1(3),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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