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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 신이 그린 인간의 자화상

<콘클라베(2024)> 리뷰

by 더 레터박스

<콘클라베>는 정치적 서스펜스의 외피를 빌려, 종교 아래의 인간으로써 스스로 구원으로 향하는 길을 일궈내고, 장르적 긴장감과 종교적 성찰을 긴밀하게 엮어 스릴러를 넘어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자아낸다. 이 영화는 주제와 소재. 그러니까 이야기하고픈 바와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스토리적 장치 및 세계관 등이 유기적인 인과관계를 맺는다.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은 ’교황‘이라는 막중한 소명(vocation)을 얻거나 저지하기 위해 인간(mortal man)들이 벌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는다. 캐릭터들의 계략 속에는 장소와 형태를 넘어선 고유한 서사적 압력이 잔존한다. 그 힘으로 인해 압축된 2차원의 스크린 속 간계와 거룩함의 빈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스펜스‘는 이것이 단순한 종교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즉, 이 영화는 한 편의 정치 스릴러이며, 시스티나 성을 봉인함으로써(Cum Clavis) 영화적 시공간이라는 밀실 속에 관객과 캐릭터들을 감금하고, 그 캐릭터들로 하여금 반으로 갈라서서 서로를 힐난하거나 설파하도록 만든다.


정치 스릴러의 특징인 서스펜스와 스릴러가 이 영화의 미장센에 가한 압력으로 인해 스크린의 채도는 붉은색과 검정색, 흰색, 남색만을 남긴 채 침묵한다. 배경음악은 이 장르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나,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바이올린의 높은 음색으로부터 탈피하여 관객의 심박수를 고조시키기 위해 무겁고 조용한 첼로의 속삭임으로 변주된다. 그러나 이 모든 스릴러와 서스펜스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콘클라베>는 종교적인 색채와 소재를 그저 정치 스릴러의 채색만으로서 잔존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틀려버린 모든 캐릭터들의 뿌리는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여, 비열한 수를 사용해서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교황이라는 직위는 사실 종교인으로써의 꿈이요, 신실한 숭배의 과정이며 자아실현의 목적임을 관객에게 환기시킨다.


이는 작중에서 모든 캐릭터는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를 뿐, 그 배경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방식이 다르다는 점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어떻게 보면 피상적이기도 한 우리의 인식에 대한 변화를 구한다는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콘클라베>가 지닌 정치적 및 종교적 드라마의 이중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교황의 서거 후, 시스티나 성당에서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세계 각지의,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추기경들은 정치적 입장, 개인적 욕망을 안고 여러 차례 투표에 임한다. 한편, 토마스 로렌스(레이프 파인스 역)은 교황으로부터 의중 결정된 빈센트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스 역) 추기경을 콘클라베 전 날 시스티나 성에서 맞이하고, 자유주의 세력인 알도 벨리니(스탠리 투치 역) 추기경과 보수주의 세력의 고프레드 테데스코(세르조 카스텔리토 역) 추기경 등 여러 추기경들을 만나 투표를 진행한다. 그러나, 여러 추기경들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고, 투표가 진행될수록 여러 추기경들은 밝혀지는 소문의 진위로 인해 혼란에 빠지며 3일 동안의 콘클라베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채 진행된다.





관객은 콘클라베의 관리자인 로렌스의 시야를 따라 이 모든 군상극의 1인칭 관찰자로써 콘클라베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로렌스는 1인칭 관찰자보다는 3인칭 관찰자에 더욱 가까운 캐릭터이다. 그는 중립적인 관리자로써의 사명을 기조로 하여 철저하게 투표의 전 과정에서 자신을 배제시킨다. 교황의 선종을 목격했을 때 그는 슬퍼하는 한 명의 인간이었으나, 그는 콘클라베의 관리자이자 추기경의 역할을 할 때는 안경을 쓰고 인간으로써의 자아를 묻어둔 종교인으로써 투표를 진행한다. 하지만 레이먼드 몬시뇰(브라이언 F. 오번 역)과 대화할 때 그는 ‘외부로써 완벽하게 단절된’ 종교인으로써의 자신을 벗어두고, 교황의 뜻을 해석하고 충실히 이행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써 존재한다.


로렌스라는 캐릭터는 감정보다는 신념에 가치를 두고 활동하는 캐릭터이기에, 관객은 그를 주인공이 아닌 안내자로써 인지하게 된다. 이를 의도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감독은 로렌스의 시점 샷을 통해 작품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면서도, 로렌스가 방에 있는 단독 샷에 그를 프레임의 정중앙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화면의 중심으로부터 어중간하게 앉아 있는 미장센을 통해 그를 비춘다. 또한, 그가 스스로의 책임에 짓눌리는 여러 모습을 바스트 샷과 클로즈업을 통한 하이 앵글로 비출 때, 카메라는 반복적으로 붉은색 문이나 여러 문틀 사이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 로렌스의 모습을 비춘다. 이는 봉랍되었던 교황의 붉은색 방문을 연상케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교황이나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로렌스의 행보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고, 관객은 마치 신의 시선을 빌려 그를 관찰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1인칭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이며, 1인칭 관찰자로써 시스티나 성당의 3일을 조명하는 인물인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동료들을 마녀사냥하는 사람(witchfinder)이 아니다” 라며 자신의 이중적 행보를 변호하나, 로렌스는 사실 관리자보다는 검사관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18)”라는 격언처럼 그는 모든 추기경도 한낮 인간(mortal man)임을 연설에서 강조한다. 그는 “확신(certainty)은 의심을 막으며, 이는 곧 관용의 가장 큰 적이다” 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추구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비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지니는 편향적인 시선을 최대한 지양할 것을 소망한다는 대사를 통해, 그는 감독의 페르소나로써 단순하며 직설적인 메시지를 제시한다. 위 메시지는 폭력 앞에서마저 관용을 제시하는 베니테스 추기경의 당선을 암시하는 장치로서도 작용한다.

로렌스는 작중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나 <최후의 심판> 속의 인물과도 눈을 마주치는데, 이 때 로렌스의 모습은 사명감(vocation)을 지닌 콘클라베의 관리자이며 단장이자, 현 상황으로부터 타개할 방법을 자신보다 높은 존재에게 갈구하는 한 명의 어린 양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지게끔 보인다. 사명감과 현실 간의 괴리로 인해 고뇌에 빠진 로렌스를 하이앵글로 자신의 방에서 비추는 씬, 투표지를 들고 여러 후보자 사이로 미끄러지듯 걸어 가는 로렌스를 패닝과 부감 숏을 통해 비추는 씬들을 통해서 감독은 그의 지위와 감정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한 부박함을 여실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형식주의와 사실주의가 혼용된, ‘시네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스크린의 비현실적인 시점으로 인해 과도하게 비대해진 공간감과 반대로 롱 숏과 같이 스크린 속 인물의 존재감을 왜소하게 느끼도록 그를 비춘다. 이로 인해 관객은 로렌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답답한 감정만을 피상적으로 어렴풋이 느끼며 그의 행보에 동행한다. 하지만, 종교인이 아닌 인간으로써 느껴지는 그의 간절함을 통해 영화는 관객을 ‘신의 대리인’으로써 극을 바라보게끔 만든다. 이는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이어진 관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공감각적 유대감을 피상적으로 느끼게끔 만든다. 더 높은 존재로써, 관객은 작품과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캐릭터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스토리텔링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의 얼굴을 그리고 있으나, 이는 선대 교황의 예지 속 일부분임을 작품은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이 작품의 각 캐릭터들은 타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지은 원죄로 인해 한낮 인간이 되었다. 평생 주님만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언약을 깬 아데예미 추기경, 성직 매매를 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교황이 되고자 하는 트랑블레 추기경, 극단적인 언사와 행보로 인해 교황청을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테데스코 추기경,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을 버리고 승자의 편에 서려고 한 벨리니 추기경. 이 모든 추기경들은 수십년간 종교에 자신과 시간을 바쳐 일구어 낸, 가장 인간과 먼 행동을 통해 일구어 낸 직위를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다운 면모로 인해 상실해버렸다. 마치 정치적 서스펜스의 압박으로 인해 탈구된 플롯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인간이라서 부족하며 미숙하다는 일방적인 시각으로 캐릭터들을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이고 외면적으로만 관조한다. 영화는 안타고니스트가 가진 보수주의라는 신념과 그들이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봉사는 사명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그 사명감은 사람이라는 생물의 감정과 이성이 빚어 낸 산물이기에, 마치 초자아와 같은 사명감은 이드와도 같은 본성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노켄티우스(Innocent)’라는 이름을 갖게 된 베니센트 추기경(카를로스 디에스 역)의 캐릭터 설정도 결국 인터섹스라는 전통적인 천주교적 관점에서의 원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위와 같은 인간의 본질적이고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가치판단의 개입을 지양하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내재되어 있는 서사적 장치이다.


예로부터 정치와 종교는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해 왔다. 동양의 샤머니즘부터 서양의 출애굽기 등 수많은 당시대의 기득권층은 경국과 신앙을 통해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서 군림해 왔다. 그 두 세계를 이끌게 된 사람들은 초심과 정반대로 타락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초심은 소명과 동등할 정도로 순수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클로즈업된 이중적인 오브제를 통해 양립하는 신념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클로즈업된 그들의 손은 어부의 반지를 소망하는 추기경들의 욕망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반대로 그들이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주름진 손으로써 해석할 수 있다. 캐릭터들이 복도를 걸어다는 장면의 구도는 권모술수의 일부로 치부할 수 있지만, 일종의 순례로써도 해석할 수 있으며, 결국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인 두 파벌이 원하는 추기경은 당선되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 선대 교황의 거북이가 선택한 베니테즈 추기경이 당선되는 씬을 통해 진정한 관용을 수용한 사람이 그에 걸 맞는 자격을 가진다는 모습을 시사했다.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 가운데 너희가 부정하게 여길 것은 이러하니 곧 족제비와 쥐와 큰 도마뱀 종류와…(레위기 11:29)”이라는 구절과 달리, 선대 교황마저 이러한 말씀에 위배되는 거북이를 애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새로운 교황을 선택하였으며, 로렌스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그 거북이를 다시 정원의 물 속으로 내려 놓는다. 이 영화는 수녀들이 걸어가는 마지막 씬과, 콘클라베 3일 차의 시스티나 성당이 폭발하는 씬을 병립시켜 정치와 종교를 갈등시키며, 갈등과 양립된 언성이 격정에 다다른 순간, 결국 이 모든 순간은 선대 교황마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갈망하고 증오했던 우리의 모든 면모는 사람이라면 필수불가결한 모습이었고, 이 이야기는 신이 그린 인간의 자화상이었음을 <콘클라베>는 의의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그림을 그린 신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확신을 벗어난 진정한 관용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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