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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 감출 수 없는 소리와 냄새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리뷰

by 더 레터박스

우리는 과거를 복기하고 이를 재현하는 수단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주로 사용하곤 한다. 역사에 새겨진 상처를 현존해서 관객을 계몽하는 것 또한 영화의 의무 중 하나이다. 자미로콰이의 <Virtual Insanity>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우리에게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자신만의 정제된 시각과 특출난 사운드로 재조명한다. 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으로부터 파생되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위키피디아 참조). 대부분의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사울의 아들>과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잔혹한 삶과 그로 인한 죽음 혹은 파멸을 소재로, 희생자들의 시각을 대변한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와 반대로 가해자의 시선으로 회고한 과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가해자들을 옹호하지 않으며, 영화의 '주인공'이면 필수적인 관객과의 감정적인 유대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피해자들의 살갗과 옷깃에서 났던 인간미를 완벽히 탈취시켜, 그들의 육신이 남긴 비명과 고통의 악취만이 가득한 삶에 무뎌져버린,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한 등장인물을 비출 뿐이다. 관객은 이러한 점진적이고 일상적인 학살자의 정원으로부터 공포심을 느낀다. 마치 우리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을 마주하고 느끼는 비인간성으로부터 받는 꺼림직한 느낌은, 구타당하는 피해자의 얼굴을 비추는 타 영화들과 다르게 무표정으로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함으로써 스크린 위에 각인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역)와 헤트비히(산드라 휠러 역)의 가족이 수용소 담장 옆 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카누를 타고 강을 누비거나,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며 재우기도 하고, 집의 정원과 여러 꽃들을 꾸미는 삶을 보낸다. 루돌프 회스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가족들을 집에 남긴 채 오라니엔부르크로 전근을 가고, 그곳에서 일을 하다 다시 아우슈비츠로 발령을 받게 된다. "대총통께서 이번 작전에 나와 당신의 성을 딴 이름을 붙였다"며 회스는 기뻐했고, 파티에 참석한 루돌프는 연회장의 발코니에서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살핀다. 그 후 모두 떠난 건물의 불을 끄는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헛구역질을 한다.


청각과 시각의 불일치, 그로부터 발생한 '역겨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을 본질적으로 혼란시키는 연출적 특징을 지닌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3분 동안 암전 속에서 낮고 불쾌하며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후 새소리로 전환되며 영화의 첫 장면을 비춘다. 암전된 화면과 날뛰는 음악의 첨예한 갈등과 같이, 이 영화 속에서 시각과 청각은 지속적으로 대립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시각의 영화'와 '청각의 영화'가 따로 존재하며, 그들을 강제로 봉합한 것 같은 이러한 시·청각적 특징은 관객을 영화로부터 몰입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일례로, 헤트비히의 어머니와 헤트비히가 수용소와 집을 가로막는 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씬에서, 카메라는 벽의 시선에서 두 캐릭터를 투 숏에 담는다. 그와 반대로, 리나와 레트비히가 정원에 대한 대화를 하며 수평으로 패닝하는 숏에서는, 두 캐릭터 뒤의 화면 속 원경에 지속적으로 벽을 등장시킨다. 이처럼 은연 중에 시각과 청각이 충돌하도록 만드는 연출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에서 일부분에 불과한 '벽'이라는 요소에 눈길을 가게 만들며, 부자연스러운 시공간적 연결성을 인지시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각과 청각의 충돌은 등장인물들의 '비인간성'을 부연 설명하는 내러티브적 요소로 승화된다.

그러나 이들의 충돌은 단순히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나타내는 방안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된 미감인 자연 경관 중 회스 가(家) 정원의 꽃들은 작중 내내 들리는 터빈 소리와 함께 사실적인 자연광 아래에서 아름답게 비춰지는데, 이 꽃이 잘 자라기 위해 주는 비료의 원재료가 소각로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시체와 그것의 재라는 아이러니하고도 끔찍한 사실을 비동기적이며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미장센의 미감과 그것을 이루는 속내의 간극은 위선적이라는 감정을 촉발시키며, 이는 '역겨움'이라는 공격적인 불쾌감으로 전환된다. '역겨움'은 청각과 시각의 불일치로부터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일부이기도 하나, 청각과 시각이 각각 가진 진실의 '역겨움'을 결부시키며, 관객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필수불가결적인 스토리텔링적 촉매로 변모한다.



가로막는 벽과 전달하는 강

수용소와 집을 가로막는 벽은 계급의 경계와도 같이 견고한 구분을 자랑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영원히 격리된 공간이 아니기에, 벽은 '강'이라는 매개를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무게 속으로 회스를 밀어넣는다. 벽은 그것이 지닌 서브텍스트나 메타포를 통해 캐릭터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벽은 그저 미장센의 뒤편에 서서 항상 존재할 뿐이다. 회스 가의 벽은 베를린 장벽이나 6.25 분단선처럼 붕괴해야 할 목적도 없으며, 중세 계급의 성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나 이는 작중의 캐릭터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이다. 수용소 내부의 이름없는 희생자들은 벽 밖의 세상을 갈망했을 것이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가스실에서 온 몸의 체액을 내뿜으며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은 잿덩이로써의 육신으로 강물을 타고 머나먼 여행을 떠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자들의 영원한 잠은 가해자들의 물놀이에 등장한 안와뼈이자 불청객이 된다. 강은 회스가 아이들과의 추억을 쌓은 공간이자, 그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벽이 막을 수 없는 죄를 그에게 전달해 주는 심판자이기도 하다. 물놀이를 한 후 회스의 몸에서 나온 잿가루를 바라보는 폴란드인 하녀를 로우 앵글로 비추는 숏은 로우 앵글이 주는 인물의 비범함보다, 하루아침에 그것과 같이 변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실. 그리고 씻기를 반복해도 절대 벗을 수 없는 학살의 죄를 넌지시 제시함으로써 위압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유해도 그 강을 따라, 자신의 죄를 따라 떠내려갔을까.



만연한 비명과 보편적인 악취의 평범성

영화 초반부 가스실과 화장장을 추가로 건설하기 위해 논의하는 씬, 헤드비히가 캐나다(Kanada - 실제 유대인들의 소지품을 압류한 창고를 부르는 이름이었다)에서 가져 온 모피 코트를 입고 주머니 속의 립글로스를 바르는 씬과, 아들들이 시체의 금니를 몰래 수집하거나 온실에 가두고 가스실을 모방하는 장난을 치는 씬은 안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토지 강탈부터 대학살까지. 인종청소라는 괴이한 단어와 말살주의가 나치즘을 지배하면서 같은 인간임을 망각하고 죽어야 될 존재로 변이된 유대인들은, 등장인물들에게 꽃의 비료 그 이상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의 앰비언스에 시종일관 등장하는 낮고 불쾌한 소리는 소각로의 터빈이 돌아가는 소리이다 - 역설적이게도 꽃의 비료가 만들어지는 소리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관객은 2시간의 짧은 시간동안 불쾌한 터빈 소리에도 경각심과 불편함을 나타내는데, 비명 소리, 총소리, 고함 소리가 뒤섞인 지옥의 사중주가 빈번한 곳에서의 삶은, 그들을 즐비한 죽음에 적응시키는 한편 덜어낼 수 없는 죗값을 은연 중에 쌓았다. 내재되는 악의 피폭으로 인해 유모는 술에 취해야지만 잠이 들고, 몽유병을 앓는 딸, 아우슈비츠의 진상을 알게 된 후 그 죄악에 동참한 것을 인정하기 싫어 돌아가는 헤트비히의 어머니 등 가족들의 행태는 시종일관 '드라마'로부터 멀어지기만 한다.

또한,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악취'이다. 매일마다 시체를 태우며, 수용소에 구금할 사람들을 데려온 기차의 매연, 소각되기를 기다리는 부패한 시신의 냄새, 포격으로 인한 매캐한 연기 등, 작중 등장하는 여러 악취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반대급부의 효험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바를 나타낸다. 자연을 사랑하는 회스의 면모는 역설적으로 스크린에 팽배한 악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상상하게끔 만든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 꽃을 키우고, 시체의 재로 비료를 만들어 악취를 꽃향기로 바꾸기를 소망한다. 아름다움으로 눈을 멀게 하여 죄를 잊어버리려는 속셈인 것이다.



빛과 어둠처럼, '관심 지역'과 '무관심 지역'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빛과 어둠의 보편적 인식에 관한 역설을 이야기한다. 회스와 그의 가족들은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러 다니며, 어둠을 불러오는 존재이다. 하지만, 폴란드인 소녀가 노역으로 지친 수용인들을 위해 불이 꺼진 밤에 몰래 사과나 배를 흙더미 속에 숨겨 놓는 모습을 열화상 카메라로 담는 씬에서는, 작중 모든 씬에 비해 색이 단조로우며 활기가 없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곳에서 희망은 피어난다는 말처럼, 관객은 '어둠 속의 빛'을 시각적이며 내러티브적으로 선사받으며, 어둠 속 한낱 촛불과도 같은 이 희망에 이입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생기없는 장면과 등장인물에게, 관객은 처음으로 감정적 동요를 가진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관객에게 '관심 지역'이 생긴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등장인물들에게 가장 무관심한 지역이기도 하다. 회스가 연회장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며 어떻게 죽일 것인지만 고려하는 살인 기계의 모습을 보여준 후 계단을 통해 하강하는 씬을 통해, 회스의 '관심 지역'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살생의 무게감을 상실당한 채 그저 연회장의 모두와 같은 인간인 유대인들은 '무관심 지역'이라는 것을 공포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룩크 좔 촬영감독은 선명한 디지털 화질 선택과 자연광 활용이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좁히는"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행태의 학살과 인간성의 상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사실적인 조명 기법을 통해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해야 하는 이유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걸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며 거미줄 형태로써 결합되어 주제의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각각의 요소 - 특히나 사운드 - 는 당시대의 '고증'을 준수함과 동시에 제목의 일부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제목인 the Zone of Interest는 나치의 무장친위대(Waffen-Schutzstaffel, SS)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 구역을 뜻한다. 즉, 영화의 실질적인 배경도 '관심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 구역질을 마치고 정면을 응시한 회스의 눈 앞에 실날같이 비추는 한 점의 빛은 현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으로 전환되며, 엄청난 수의 신발과 수용복, 액자 속 희생자들의 사진 등을 비춘다. 이는 희망의 빛은 미래에서부터 전달되어, 오히려 미래의 빛이 다시 과거의 희망을 재조명한다는 서사적 윤회를 가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뇌는 속을지언정 육체는 속일 수 없었던 최후의 양심이 무고를 주장하며 뱉어내려는 죄는 더 이상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미 그 죄는 몸에 쌓여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죄는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았다.

우리의 눈은 무언가를 바라볼 때 해당 물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흐리게 바라본다. 삶이란 것은 선택과 남겨짐 사이의 간극이다. 인간은 선택을 바라보고 나머지는 망각하는 동물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리에게 시선과 망각 사이의 간극 속에서 잊혀지기 시작하는 과거를 복기해내라고 종용한다. 진정한 속죄는 화해가 아니라, 잊지 않는 것이라고. 과거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며, 그것이 시간을 빌려 숨기려고 하는 '감출 수 없는 소리와 냄새'를 모두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속죄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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