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 맑음

비를 머금은 반짝이는 이슬과 푸르른 새싹

by 리리

인생이란 그렇다.

항상 비만 오지 않는다.

비가 오면 다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그 속에서 푸르른 새싹이 올라온다.

세차게 내리꽃던 비를 이겨내고 오랜 기간 품고 있었던씨앗 속 여리고 푸루른 새싹이 올라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멀리 멀리.


그렇게 본다면 나는 이제 막 겨우 세상을 향해 올라왔다. 아직 작은 새순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알고 있다.

새싹은 천천히 하지만 열심히 드넓은 하늘 위로 끝없이 뻗어나가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의 본질 자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모든 것을 회피하기 바빴던 어린시절의 나는 아직 웅크려있는 씨앗과 같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씨앗이었을 때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나를 가둬두고 조금 더 세상에 나가려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대학생 때부터 이어져오던 무려 5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너무나 지치고 외로웠었다. 혼란스러웠다. 나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술을 먹고 방황하며 소중한 나를 혹사시켰다.


그러던 중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소개팅 어플을 깔았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즐거웠다. 뭔가 다시 채워지는 기분. 다시 안정되어 가는 기분.


내 눈에 완벽해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매력적이었다. 좋은 직장. 정돈되어 있는 집.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 나는 동물들을 사랑했기에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믿어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와의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를 X라고 부르겠습니다.)


역시나 만나고 나서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뭔가 하나씩 걸리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거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고, X는 완벽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서로 맞춰가며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정되고 싶었다. 결혼을 해서 얼른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안정감을 가지며,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두세번의 만남 끝에 결국 X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정말 정말 어른처럼 느껴졌다. 나를 이끌어주고 안정시켜주고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의지하고 싶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20대 중반의 나는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왜냐면 나에게 사랑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내가 받아왔던 사랑이란 맹목적인 거였으니까.

우리 가족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그 속에서 행복을 얻고 고마움을 얻고 그런 것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래서 내 사랑을 X에게 보여줬다.

X는 처음엔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점조차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성숙하지 못한 나를 성숙하게 이끌어주기 위해 거리를 두는 기분.


그게 맞는 방법일까?

지금은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의 방법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많이 어려웠다. X는 나를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보여줬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다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게 보였다. 기뻤다.

이제야 뭔가 정말 통해간다는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도 뭔가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왜냐면 그가 하는 말들은 언제나 조금씩 달라졌었고, 그건 날 좀 혼란스럽게 만들었었다.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으니까. 내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까.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맹목적이었다.


X는 나와 만난지 일주일 만에 갑자기 자신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인의 사정이 있다고만 말했다. 믿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길래. 그럼 응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그에 대해서 모든 걸 너무 몰랐다. 내가 봐온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일부분이었고, 그건 얼마든지 만들고 꾸며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땐 그런 걸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고, 보여주고, 그러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순진했다.


하루하루 충실히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욱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만난지 한두달이 됐을쯤, X는 할말이 있다고 했다. 너무나 망설이고, 너무나 힘들어했다.

나는 너를 계속 속여왔다고 했다.

너무나 그 사실이 두려웠지만, 들어보고 싶었다.


설득 끝에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조차 계산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알고 있던 나이는 네 살 차이였지만, X의 나이는 사실 일곱 살이 많은 거였다.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다. 믿고 싶어 했던 마음과 부딪혔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X도 용기를 내준 거였으니까.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를 먼저 다독여줬다. 괜찮다고, 나이는 상관없다고, 나는 계속 믿을 거라고 오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때 했던 결정들은 모두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한다? 잘 모르겠다.

그때의 감정들에 대해 지금 생각해보면….

하지만 거기에서 얻은 것들은 분명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어쩔 수 없다.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 생생한 기억들이지만 내가 얻은 것만 남기고 감정들은 비워내야 된다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결국 커다란 나무가 되어 세상을 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단단한 나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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