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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함에 익숙해지는 중

by 진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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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었던 건강검진의 날이 밝았다. 검진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 테니, 보조배터리와 에어팟으로 중무장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연초, 평일, 오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진 병원은 생각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진 않았다. 하지만 초음파실 앞에 앉아 있자니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순서가 언제 올지 모르는 대기실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이때를 대비해 잔뜩 해야 할 것을 챙겨 왔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다. 전날 단식의 여파인 걸까.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검진이 끝나기 전까지는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초음파실 옆 대기자 명단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요즘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는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바로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때는 바이올린으로 먹고살 자신이 없어지자 미련 없이 바이올린을 버리기도 했고(사실 미련이 없진 않았다), 원하지 않는 학과에 입학하고서는 무단으로 학교를 그만두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엄마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한 채 혼자 부동산을 다니며 자취방을 고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회사가 생기면 미련 없이 이직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런 대담함은 연애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 밀당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생각한 방향이 선명하면 절대 망설이거나 기다리지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조교를 하던 시절, 나는 당시 학과 교수님을 굉장히 존경하고 따랐었다. 교수님 옆에 붙어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교수님이 전공하고 계시는 분야에 큰 관심이 생겼다. 저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고, 더 파고들고 싶었다. 나조차도 나에게 이런 학구적인 측면에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큰일을 겪고, 하고 싶은 일을 잠시 접은 채 현실과 타협해 취업을 했다. 아마도 내 인생 최초의 커다란 멈칫함이었던 것 같다.


한번 멈칫한 뒤 조금 안정이 되면 다시 도전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이후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언젠가 꼭 공부에 도전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안정적인 일상이 무너질까 봐 망설이며 그렇게 조금씩 미뤄졌다.





사실 나는 원래도 혼자 하는 선택은 빠르지만, 다른 사람이 얽힌 선택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작게는 점심 식사 메뉴부터 시작해 만날 날짜를 정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타인중심적 인간이 된다. 그러다 보니 생각해야 할 것이 무한정 늘어나고, 어느새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큰 결정의 주체가 ‘나’였다면 결혼을 하고 나서는 ‘우리’가 되었다. 나의 선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대학원 진학도 더 이상 ‘나만의 선택’이 아니어졌다. 드디어 도전해 보기로 결정한 뒤, 이렇게나 늦게 마음을 결정한 내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러한 나의 변화에 대해 우유부단해졌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고, 나이가 들었나 보다고 체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신중해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는 것도 아니다. 방향을 재조정하며 걸음을 늦추는 것. 아마 이것이 지금의 내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선명한 길을 따라 곧장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춰서 바람을 읽고, 길의 결을 느끼고 있다.


기다림이란 결국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가늠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천천히 걸어가는 지금의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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