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시간마저 소중한 추억
“엄마, 친구 집에 데려와서 밥 먹고 게임해도 돼요?”
중학생이 된 큰아들은 가끔씩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들을 데리고 집 아닌 곳으로 왔다. 그곳은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담긴 식당, 순댓국밥집이었다.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우리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살림만 하던 내가 식당 주인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남편 친구가 이미 차려놓은 가게를 권했고, 우리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순댓국 맛을 내는 법부터 장사하는 법까지 남편 친구의 아내에게 하나하나 배워가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가게는 어느새 아이들까지 자연스레 오가는 공간이 됐다. 주말만 되면 큰아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와 가게 한쪽에 앉아 외쳤다.
“엄마, 배고파요! 순댓국에 밥 주세요!”
손님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던 녀석들은 웃으며 한 그릇씩 뚝딱 비웠다. 그리고는 3층으로 올라가 게임을 하고 떠들며 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가게 일을 멈추고 간식으로 김밥을 말아 올려 보내거나 치킨을 튀기곤 했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줄 수 있는 게 식당을 하는 유일한 장점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식당 해서 부끄럽지 않았어?”
큰아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친구들이 그때 엄마가 만들어준 순댓국 진짜 맛있었다고 아직도 얘기해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게는 우리의 땀이 배어 있는 곳이었지만, 나에게는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기도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며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나날들이었다. 멋모르고 시작했지만 우리 가정의 생계수단이었기에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는 경주마처럼 참 열심히도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가게를 그만둔 이후로는 순댓국을 먹고 싶지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남편과 속초 여행 중 우연히 순대국밥집을 발견했을 때, 남편이 제안했다.
“우리 한번 먹어볼까?”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참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남편과 마주 앉아 순댓국을 한 숟가락 뜨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 친구들 매주 데리고 와서 싹싹 비우던 모습이 생각나네.”
“맞아. 얼마나 씩씩했는지. 우리가 힘들 때 참 고마웠지.”
“당신 고생 많았어.”
그 말에 “당신도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말해주었다.
눈앞에 떠오른 건 가게 한쪽에서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지금은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순댓국 한 그릇에는 우리의 고생, 아이들의 성장, 그리고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날 남편과 함께 먹은 순댓국은 뜨겁고도 따뜻한 위로가 됐다.
가끔은 힘겨운 시간들조차 돌이켜보면 귀한 추억으로 남는다는 걸 느낀다. 순댓국 한 그릇,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주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