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첫 갈등, 그리고 성장
아이를 키우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갈등이 찾아온다. 부모는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당황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운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늘 공평함을 신경 썼다. 장난감도, 옷도 가급적 똑같이 사 주었고, 아이들이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랐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작은 아이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아니, 싫어, 왜”라는 수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깨끗이 집안 청소를 해놓으면 어느새 아이는 장난감 바구니를 들고 나와
거실을 온통 어지럽폈다. 그러니 좋은 말이 나가지 못할 때가 있었다.
차분하게 설명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안된다는 말부터 했던 지난날들이
손녀를 키우며 회상하게 된다.
나는 무심코 공을 던지는 손녀를 보며
“그러면 안 돼”라고 했을 뿐인데, 아들은 그것이 부정적인 말이라며 지적한 것이다.
속이 상했다. 내가 손녀를 위해서 한 말인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아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무조건 “안 돼!”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반복되는 육아의 순간마다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너도 나중에 더한일도 많은데 키워 보면 알 거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들의 말이 맞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내가 키우던 방식보다 아들은 무한 반복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유식을 먹이더라도 식탁에 앉혀놓고 먹였다. 밥 먹을 때 돌아다니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은 손녀에게 밥을 먹을 것인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말을 해주었다.
“엄마 말하기 시작하니 점점 고집이 세져요.”
“그럼 어디 애 키우기가 쉽냐.”
“그래도 엄마는 너 키울 때 그렇게 못했는데.”
“잘하고 있네.”
아들은 가끔 자신의 어린 시절 어땠는지 물어본다.
생각해 보면 풍족하지도 못했고 초보 엄마가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지치고 힘들 때 어찌 키웠나 싶을 만큼 기억도 희미하다.
아들은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었다. 맞벌이 부부로 그는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미리 약속을 정해가며 하원을 도왔다. 저녁이 되면 며느리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들은 아이를 목욕시켰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아들은 점점 더 육아에 능숙해졌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육아서를 읽으며 최선을 다해 손녀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감탄했다.
"내가 아이를 키울 때도 이렇게 계획적으로 했던가?"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육아란 항상 즉흥적이고 정신없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부부가 함께 가사와 육아를 분담하며, 미리 계획하고 조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만이 없을 리 없다. 힘든 순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함부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까운 만큼 쉽게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육아 문제는 더 그렇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너무 개입하면 서로 불편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켜보기로 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되, 조언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손녀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 시간을 포기하면서도 여전히 부족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한다.
갈등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때그때 감정을 풀고, 대화를 나누며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그 방법을 배웠고, 이제는 아들이 같은 과정을 겪으며 배우고 있다.
예전에는 속상했던 아들의 말이 이제는 따뜻하게 다가온다.
"엄마, 부정적인 말 하면 안 돼요."
그 말속에는 아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나도 그 말을 가슴에 새긴다.
손녀가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지켜보고 응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