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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찾기 Mar 23. 2023

'K장녀'와 'K차남'이 결혼하면

끝을 알 수 없는 'K' Life

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K장녀'다. 평범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 못했던 집안의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보수적이셨고, 남동생은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녀석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큰 탈을 일으키지 않는 믿음직한 장녀로 살아왔다.


그리고 남편은 '차남'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보니 역할은 'K장남'인 남자다. 2남 중 차남이지만, 형은 늘 꿈을 좇으며 살아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본인이라도 사회에서 인정하는 것들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당연히 부모님의 기대도 남편에게 쏠렸을 것이다.


하필 이 둘이 결혼을 한 것이다. 나는 좀 나보다 가볍게 살 수 있는 사람을 원했는데, 남편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유유상종'은 진정 과학인가 보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덧 결혼 12년 차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내 질문에 누군가는 이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지 모르겠다. 충분히 상상이 가는 삶일 테니.


우리의 타고난 책임감은 양가의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빨리 자리를 잡아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부모님 사이에 생긴 문제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명감, 부모님의 행복을 찾아드려야 한다는 사명감 등등이다.


우리 내면의 문제가 아닌 타의적인 부분도 있다. 우리는 명절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께서 원하는 각종 친척 행사 자리를 참 많이도 다녔다. 나는 살림 잘하는 며느리로, 남편은 성격 좋은 사위로 지내느라 각자 설거지와 음주에 최선을 다하기도했다. 사소한 인터넷 업무처리나 쇼핑 등도 우리가 도맡는다.


자식으로서 치러야 하는 경제적인 역할도 양가에서 대부분 우리 부부 홀로 해내고 있다. 경제적인 능력의 부재는 누구의 잘못이 아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우리 부부만의 힘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복합적인 삶이 모두 담겨있던 것이 바로 우리 집 소파였다. 혼수품이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난 후 그 위에서 실컷 뛰어노니 소파는 거의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에 가죽마저 다 해지고 낙서까지 잔뜩이라 더는 쓰기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우리는 소파 교체 대신 3만 원 대 커버 구입을 결정했다. 거실에 놓여있는 그 허름한 소파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이 얼마나 궁색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 소파를 쉽게 사지 못했다.

양가 부모님들의 넉넉지 않은 형편을 고려하면 우리만 좋은 소파를 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로 사고 싶은 소파를 열심히 찾다가도 양가 부모님의 소파를 떠올리고는 검색창을 닫았다. 부모님들께서 무심코 하셨던 경제적인 푸념들이, 그런 순간마다 우리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에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결심이 섰다.


"오빠, 우리 소파 사자. 그것도 저렴한 것 말고, 진짜 우리가 갖고 싶고 필요한 소파로 사자. 이러다 우리는 언제 예쁜 집에 살아? 나 이제 그냥 살 거야."


그렇게 나는 소파를 구입했다. 새 소파로 확 달라진 집 분위기에 우리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며칠 후 잠시 집에 들르겠다는 친정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마치 몰래 호사를 누리다 들키게 된 사람처럼 우리는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곧 부모님이 도착하셨다. 내가 나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들을 시작하려는데, 그럴 틈도 없이 엄마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우리 어쩔 수 없이 소파를 바꿨잖아. 왜 그랬냐면......"

"드디어 버렸네, 버렸어. 속이 다 시원하다. 진작 좀 바꾸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또 잔소리한다고 할까 봐 꾹 참았잖아. 야, 집이 달라 보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작 엄마는 특별한 생각도 없이 지내는데, 나 혼자 대체 왜 그렇게까지 부모를 신경 썼을까? K장녀, K며느리의 굴레는 어쩌면 내가 만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K'가 들어가는 모든 장녀, 차남, 며느리, 사위 등으로부터 조금씩이라도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요즘엔 주말에 어른들 모시고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 보다는, 우리 네 식구가 이번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K'의 굴레는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오늘도 임영웅 싱어송 상영회 예매를 해줄 수 있는지, 인터넷 쇼핑의 보안은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인지, 미혼인 형과 남동생을 챙겼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담긴 카톡들이 줄줄이 울린다.


과연 'K'의 굴레는 우리가 만든 것일까 우리의 환경이 만든 것일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도 없는 우리의 삶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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