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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면 충분합니다.

나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by 크런치바

오늘 나의 하루를 담아내는 말이다.


오랜만에 평일 점심을 온전히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쉬는 날 하고 싶은 일들은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은 일단 잠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씻지 않고 있는 것이 포인트였다.


아이들과 남편이 집을 나서자마자, 나는 밀렸던 설거지를 후다닥 했다. 오늘만큼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겠다 마음먹었지만, 쌓여있는 설거지가 주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저거 해야 되는데!'라는 갑갑함 대신, 나는 그까짓 설거지를 해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느끼기로 했다.


꼬질꼬질한 차림새로 요즘 푹 빠져 읽는 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책과 작은 이불을 들고 소파에 누웠다. 진짜 책을 읽고 싶었던 게 맞았을까?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 나니 2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좀 있으면 비데 점검을 위해 기사님이 오실 예정이었다. 인간의 행색은 하고 있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었다. 세수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기사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반드시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리라는 의지이기도 했다.


모두 마치고 나니 배가 고팠다. 기껏 해놓은 설거지를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군고구마를 해 먹기로 했다. 얼마 전 선물 받은 맛 좋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서 에어프라이기에 넣었다.


군고구마가 완성될 즈음 커피 한 잔을 내려 드디어 소파를 벗어나 식탁에 앉았다. 이제야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책을 읽으며 고구마 한 입, 커 피 한 입 번갈아 먹었다.


참 좋았다. 바빴던 지난 두 달 시간에 대한 보상 같기도 하고, 이번 한 주를 잘 보낼 충전의 시간 같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는 본인의 삶에 대해 '후불제 인생'이라고 했다. 삶의 과실을 먼저 누렸고 지금 계산을 치르는 중이며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문득 내 삶은 어떨까 궁금했다. 내 인생 전체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불제와 선불제가 뒤섞인 것일까? 혼자 오늘의 휴식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나에게 무척 귀한 순간이다. 나는 자주 오지 않는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더 의미 있는 건 보상받고 싶은 이러한 순간, 내게 필요한 것이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걸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나가서 돈도 시간도 덜 썼을 텐데...라는 우스운 생각도 해봤다. 온전히 '나'로 편안히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큰 보상과 힘이 된다.


슬슬 겨울의 냄새가 느껴지는 이맘때, 군고구마와 커피 향이 뒤섞인 공간에서 오늘 나는 마음껏 뒹굴었다. 이제 다시 할 일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기왕이면 성실히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잘 쉬었나 보다. 군고구마면 충분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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