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자랐다. 소꿉친구 위니, 폴과 파란만장(?)한 유년 시절을 보낸 케빈, 나도 천재였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게 만든 두기, 미국 맨해튼의 소박한 아파트와 커피숍에서 꿈과 사랑을 키워나갔던 레이철, 모니카, 조이 등등 그들이 나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봤을까. 매년 6월을 기다렸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몰려오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떤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지 기대하며 개봉 날짜를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일은 심장마저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할리우드 키드’였던 내가 미국을 동경한 건 당연한 일이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하지만 바라는 만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너무 먼 나라였다, 미국은.
하지만 마음을 그쪽으로 품으니 또 발길이 향하는 날이 오더라. 미국에 가게 된 거다. 그것도 LA에. 빡빡한 일정을 좋아하지 않는 나답게 3개월쯤 쉬다 오기로 했다. 마침 회사에 사표도 낸 참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미국에 있는 3개월 동안,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LAX 공항에 첫발을 내딛던 그 순간이다.
가을의 끝자락임에도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었고, 공항에는 영화 예고편에서나 들었던 중후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아, 오리지널 본토 발음이라는 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들었던 이상한 엑센트가 섞인 영어와는 전혀 달랐다. 그 방송을 들으며 난 실감했다. 여기가 미국이구나......
사실 비행기 안에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도쿄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도쿄에서 먹은 음식이 체하는 바람에 비행기 안에서 난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10시간 안팎의 시간 동안 난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승무원 언니가 ‘얘가 살았나 죽었나’(비행기 안에서 장례 치를까봐 걱정하는 눈초리로)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체했다는 의사를 전달한 후(일본 국영기라 안되는 영어로 ‘나 죽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외쳐야 했다) 승무원 언니가 갖다준 약을 먹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의 좁은 공간과 답답한 공기가 약발마저 떨어뜨린 모양인지 전혀 듣지 않았다. 거의 먹지도 못하고(미국 가는 비행기라고 기내식으로 KFC 음식이 나오더라! 오 마이 갓!), ‘난 아마 공항에 내리자마자 앰뷸런스에 실려갈 거야.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지?’를 고민하며 영작을 하고 있었다. ‘아이 해브 스토먹에잌(I have stomachache)’ 등등.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뭔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니 입국 절차를 하기 위해 긴 줄을 설 때까지도 무슨 정신으로 서 있었나 모를 정도로 힘들었는데, 입국 절차를 모두 끝내고 자동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숨이 쉬어지더라. 그때 오리지널 본토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다. 말뜻은 생각도 안나고,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내 귀에는 꼭 “살아서 도착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여기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공항을 나와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니 없던 에너지가 샘솟았다. 크게 로스엔젤레스의 공기를 흡입한 후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곧 내 차례가 되어 택시에 올랐다. 택시 기사에게 호텔 주소를 알려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택시 강도가 많아서인지 기사석과 뒷자석 사이에 투명 판넬이 설치돼 있었다. 우리나라 택시와 뭐가 다른가 꼼꼼하게 관찰한 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낯설었던 건 역시 야자수 가로수들이다. 우리나라에선 제주도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야자수들이 도로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역시 따뜻한 남쪽 나라.
잠시 뒤 영어가 아닌 언어가 숼라숼라 들리더라. 알고 보니 운전기사가 스패니시였다. 스페인말로 지인과 전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어 핸드폰을 들고 뻥뻥 뚫린 도로를 질주했다. 자기가 무슨 영화 ‘분노의 질주’ 반디젤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난 살기 위해 창문 위에 있는 손잡이를 꽉 잡아야 했다.
손에 땀을 쥐는 추격전(?)을 펼치고 먹은 것도 없는 속이 뒤집어질 무렵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해 좀 쉬고 있으니 약발이 늦게 들었는지, 아님 내 몸이 자가 치유 능력을 발휘해서인지 속이 점점 괜찮아졌다. 배가 너무 고파 룸서비스로 샌드위치를 시켰다. 아보카도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였는데, 아보카도를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날이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배가 고픈지라 꾸역꾸역 먹었다. 이역만리에서 굶어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런데 소화가 되더라. 내 몸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열심히 있는 힘껏 위가 움직여줬다. 다음날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 발견한 마트에 가서 과일을 사 먹었다. 다 손질된 과일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무래도 밀가루보다는 쌀이 소화가 잘되겠지.
K-타운에 도착해서는 그냥 입이 떡 벌어졌다. 한국 브랜드들이 다 들어와 있었다. 파리바게트, 톰앤톰스, 스쿨푸드, 심지어 CGV도 있었다. 심지어 영어를 하나도 안 써도 됐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한국어 인사가 먼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몇 명이세요?” 가끔 교포로 보이는 종업원이 영어 엑센트가 강하게 들어간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어쨌든 한국어였다.
이렇게 반가울 때가. 나중에 교포 지인이 그러더라. LA에 살면 영어 한마디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K-타운에 살면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K-타운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차이나타운이나 재팬타운에 비하면).
난 스쿨푸드에서 뜨끈한 국물 음식을 시킨 뒤(뭐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순두부찌개였나) 옆자리 아기 엄마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도 LA에 온 지 얼마 안 된 듯 여행에 대한 설렘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편 출장 따라왔다며 며칠 먼저 온 선배 여행자답게 여행지 정보를 공유해줬다. 특히 그녀는 아울렛 매장이 가득한 쇼핑몰을 ‘강추’했는데, 프라다 선글라스를 1+1에 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갈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난 잠깐의 밥친구가 생긴 것에 기뻐하며 아주 친절하게 맞장구를 쳐줬다.
역시 동행이 있는 밥은 맛있었다. ‘해외 여행지에서 굳이 한식을 찾아 먹어야 돼?’ 라는 주의였지만, 아프니까 한식이더라. 왜 밥심, 밥심 하는지 알겠더라.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있는 동안 난 한식을 더 많이 먹었다. 인생은 원래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으니까.
호텔에서 내가 한 일은 집을 찾는 거였다. 세달동안 호텔에 있을 순 없으니까. 지인의 도움으로 지인의 집과 가까운 동네 가디나(Garrdena)에 집을 얻었다. 쉐어하우스였는데, 단기로 내놓은 집은 아니었지만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3개월 단기 임대를 해주겠단다. LA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구한 집이라 집주인은 당연히 한국인이었다.
나중에 집을 보러 가서 만난 집주인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재미교포였다. 비행기를 만드는 대기업에 다니는 언니였는데, 처음에는 친절한 줄 알았지만 지내보니 성격이 좀 독특(?)한 사람이었다. 사실 지내는 내내 좀 힘들었다.
그 언니 소유의 집은 아니었고, 자신도 임대인이었다. 자신이 임대한 후 룸메이트를 구해 다시 월세를 받는 형식이었다. 정리하자면 난 이중의 임대인이었다. 미국에서는 흔한 거주 형태인 듯 했다.
집은 깔끔했다. 2층 건물에 2층 전체를 쓰는 구조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법 큰 거실과 주방이 나타나고, 거실과 연결된 복도에 방 3개, 화장실 2개가 있었다. 1층에는 작은 원룸 몇 가구와 공동으로 쓰는 코인 세탁실, 창고가 있었다.
차가 없으면 다니기 힘든(대중 교통망이 그리 잘 되어 있지 않다) LA인지라 처음에는 그 언니가 자신의 차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 구입을 위해 마트도 백화점도 데리고 다녔다.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집에는 나 말고 룸메이트가 한 명 더 있었다. 집주인 언니는 그 아이와 사이가 안 좋았다. 처음에는 집주인 언니와 그 아이가 잘 안 맞나 보다 했는데, 그 언니는 나와도 안 맞았다.
가끔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상처가 많았나 보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와(초등학교 때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왔다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트라우마가 많으면 피해의식이 생기고,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오해를 하기 마련이니까(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다. 오히려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 날까지 쉽지 않았다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앞에서 말했지만, LA는 대중교통 수단이 매우 열악(?)하다. 다운타운 쪽에 지하철이 있긴 한데, 노선이 그리 많지 않다. 버스 역시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노선이 짜여져 있고, 가디나 같은 외곽 지역은 배차 간격이 거의 1시간이다. 그나마도 일찍 끊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디나에 숙소를 잡은 걸 후회했다. 가볼 만한 곳은 거의 다운타운 쪽에 몰려 있어서 한번 나갈 때마다 택시를 불러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숙소를 옮기지 않은 건 교외 지역만이 줄 수 있는 여유 때문이었다.
가디나에 오기 전 민박집에서 이틀 정도 있었다. 그전 세입자가 나가기로 한 날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호텔에 이틀 더 묵을까 생각도 했지만, 3개월이나 있으려면 돈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민박집은 다운타운 중심에 있었다, 주택가라 그런지 마트도 멀었고, 갈 만한 식당도 없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게 고역이었다. 집 바로 옆에 서브웨이가 있긴 했지만, 삼시세끼를 샌드위치만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밤만 되면 어두운 거리에 무슨 사이렌이 그렇게 자주 울려대는지, 영화 ‘베트맨’의 고담 시티가 이런 풍경일까, 싶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이방인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간이 근처 그라지(Garage)에서 들리는 아마추어 밴드의 연습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렇게 신경질적인 소음에 시달리다 가디나에 왔는데, 동네부터가 ‘힐링’ 그 자체였다. 넓은 길 양쪽으로 2층짜리 이쁜 집들이 늘어서 있고(타운하우스처럼), 집집마다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뽐낸 장식들이 절로 미소를 불렀다.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날씨는 가을 날씨인데, 눈도 없는데, 크리스마스라니. 매우 낯설면서 이국적이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좋아 흥이 났다. 아침부터 햇님이 반겨주시니 쳐져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모닝 커피를 마시고 나면 늘 동네를 산책했다. 정원의 예쁜 장식들, 집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현관문들, 이 모두와 너무 잘 어울리는 파란 하늘을 찍고 또 찍었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면 아무 데나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땅은, 캘리포니아는 날씨로 축복받은 땅이군. 매일 그 생각을 하며 ‘여기 와서 살고 싶다’ ‘캘리포니아에 다시 온다면 순전히 날씨 때문이야’ 라는 생각도 수천번은 더 한 것 같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미국에서 지내는 내내 가디나에 머물렀는데, 역시 잘한 결정이었다. 다운타운으로 숙소를 옮겼다면 캘리포니아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돌아왔을 것이므로.
지금도 겨울만 되면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날씨를 떠올린다. 미세 먼지로 폐까지 아픈 느낌이 들 때면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가디나의 여유로웠던 동네 풍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