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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May 31. 2024

10. 때때로 새벽에 걷는다

마스다 미리는 ‘주말엔 숲으로’라는 책에서 말했다.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걸었다. 내 삶에 산책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어마무시한 비탈길을 걸었고(덕분에 다리는 항상 ‘알타리무’ 다리였다), 집에 도착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골목길을 걸었다.


하지만 파리에 살면 그냥 걷게 된다. 들이대는 곳마다 작품 사진이 되고, 거기에 음악을 더하면 뮤직비디오가 되는 풍경 앞에 걷지 않는 건 죄악이다. 지하철을 타도 될 걸, 조금 더 일찍 나와 걸었고, 친구와 카페가 아닌 산책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어떤 날은 ‘나와 떠나자(Comw away with me)’라고 달달하게 속삭이는 노라 존스를 들으며 센강을 걷다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주황색 노을이 물들고 있는 센강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생미셜 거리에서 몽파르나스까지 걸었다. 친구와 산책 겸 윈도쇼핑 겸 해서 걷다 보니 파리의 반을 종주하게 된 것이다.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상점이며 카페며 교회며 정신이 팔려있었다. 곳곳에 작은 쌈지 공원들이 나타났지만, 쉴 생각도 못하고 신나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산책은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어디를 여행하든 산책을 했다. 중국 출장을 가서도 점심을 먹고 나서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산책했고, 도쿄 시부야는 얼마나 많이, 자주 걸었던지 골목골목이 눈에 선하다. LA 가디나에서는 산책을 하다 동네 할머니와 다정하게(낯가림 심한 내가) 대화를 나눴고, LA 다운타운에서는 내 공간 감각을 심하게 신뢰한 나머지 길을 잃기도 했다.      


걸으면 걷지 않았을 때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당연하게도. 지난 일본 여행에서는 일부러 걸어 다녔다. 지하철을 탔다면 만날 수 없었던 작은 가게들, 동네 사람들이 내는 생활 소음들, 밥 냄새와 정원에 핀 꽃들이 만들어내는 달큼한 향기들, 그런 것들을 진하게 맡고 들었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현지들이 복작복작한 가게에 들러 우동도 사 먹고, 도넛도 먹었고, 예쁜 집 앞에서는 삼각대를 놓고 주민 놀이를 하기도 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와 눈을 맞추고, 동네 꼬마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산책을, 걷지 않았으면 절대 만들 수 없었던 추억들이다.          


때때로 새벽에 걷는다. 갓 깨어나고 있는 도시 풍경은 밤이나 낮에 봤던 얼굴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도시마다 그 얼굴은 미묘하게 다르다. 파리에선 빵 냄새와 함께 아침이 시작되고, 도쿄는 부지런한 샐러리맨들이 편의점에 들르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LA는 커피 체인점의 불빛과 함께 잠에서 깨어난다.

난 낮에도 밤에도 걸었던 익숙한 거리를 새벽에 다시 걸으며 이 도시 전체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고요와 적막을 느낀다. 때때로 외롭지만, 그 외로움이 묘하게 달콤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오래된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것 같아 익숙한 그 거리가 설레게 다가온다.  

        

내가 걸었던 거리 중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였나? 가만히 떠올려보면, 수많은 골목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서 최고는, 역시, 스트라스부르의 ‘쁘띠 프랑스’가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가고 싶을 만큼 혼자 보기엔 아까운 동네였다. 그리고 낭만적인 장소였다.


스트라스부르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근처 알자스 지방의 작은 도시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인 만큼 전쟁이 잦아 프랑스령이었다가 독일령이었다가 했던 곳이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파리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건물 모양도, 도시를 채우고 있는 색깔도 많이 달라(독일 양식의 건물이 많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 같은 착각이 드는 도시다. 거기에 중세 프랑스 건물이 많은 마을이 있는데(그래서 아마 ‘쁘띠 프랑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동화 마을처럼 꾸며져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작은 강이 있고, 그 주변을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골목을 걷는 느낌이 참 이상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튀어나오고, 마차가 큰길을 지나가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동네였다. 혼자 간 건 아니었는데, 무리와 떨어져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 애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뱅쇼(Vin chaud)를 맛봤다. 말린 과일과 계피 등을 포도주에 넣고 함께 끓인 음료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쌀쌀한 날씨에 얼어있던 몸이 녹아내렸다. 너무 맛있었다. 첫맛은 달달했지만 끝맛은 계피 특유의 씁쓸함이 느껴졌고, 그 맛이 자꾸 입을 당겼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고 했다. 중세 마을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라,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했고, 그때 다시 오리라 결심을 했지만, 예상대로 가지 못했다.       

사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정도는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학생의 처지로 쉬운 일은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모국어가 프랑스어인 애들과 경쟁해 좁은 관문의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 여행은 사치였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영국의 이층 버스도, 스위스의 체르마트도, 이탈리아의 콜로세움도. 그땐 프랑스와 한번 인연을 맺어 봤으니, 당연히 다른 나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을 더 미뤘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착각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살았다는(좋아하는 여행도 미루고!) 뿌듯함이 마음을 채우고 있다.          


photo by k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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