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실제로 배게 냄새가 났던건지 아니면 편하다는 포근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어서 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종, 서로 기대어, 품에 안겨있을 때 내 눈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와는 대학 3학년에 처음 만났다.
서울에 있는 별볼일없는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던 나는 당시 영어 원서를 사용하는 전공과목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대학교육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학교도 다니다 말다 하던 내게 영어 원서로 진행되던 그 수업은 학교를 더욱더 다니기 싫게 만드는, 학업을 포기하게 만드는 촉매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학과 전공필수 과목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만만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친구의 말에 그렇게 그녀와 나는 영문과가 있는 대학건물 휴게실에서 처음 만났다. 아담한 키에 몸보다 훨씬 큰 상의와 바닥을 쓸고 다니는 통이 넓은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던 힙합스타일로 매번 모범생 같은 옷만 입던 나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멋있는, 세련된 모습의 옷차림이었다.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나를 의아한,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나를 소개하는 친구의 말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과목의 점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대학교 성적이라는 것이 나중에 취직이라도 하려면 3.0은 넘어야한다는 선배와 친구들의 말에 3학년 이후 매학기 계절학기를 수강했음에도 불구하고 3.0을 간신히 넘어는 수준이라 크게 훌륭하지는 않았으리라.
그 후로 그녀와 난 과제를 핑계로 가까워지고, 자주 만나게 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졸업한 고등학교, 가족관계, 친구들 몇 명,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남자친구의 존재도 그 중 한 가지 였다. 남자친구는 당시 의경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했다. 전해들은 그는 서울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다니는 잘생긴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녀는 내게 도발을 하려는 건지, 용기를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관심없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다. 군대 간 남자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는지, 이후 발생할 일들에 대해서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안심을,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았다. 아니 잘 맞았던 것 같다. 사귀던 기간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만났다. 만나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커피숍에서, 영화관에서, 아니면 소주방, 호프집에서 매번 비슷한 래퍼토리로 웃고 떠들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했고, 함께 담배 태우기를 즐겨했다. 식성도 비슷해서 육고기와 해물탕 등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고주망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매번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이런 단조로운 만남 말고도 분명 함께한 것들이 많을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편하기만 한 만남이었을까. 같이하는 미래에 대해, 10년이후, 20년 이후에 대해 이야기 했었던가.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런 단조로움, 우리의 서로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은, 또는 하지못한 세월들이 결국 이 관계의 균열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언제만나도 편해서 웃고 떠들지만 설레지 않는 순간들이 켜켜히 쌓여 빛나던, 아름답던 기억들을 덮어버렸다.
그녀와는 총 기간으로 5년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녀는 나와 만나는 중간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중간에 헤어지기도 했고, 또 다시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 군복무로 인하여 실제로 만난기간은 3년이 채 안되는 정도였다. 만나는 기간 중 싸우고, 화해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또 싸웠다. 왜 싸웠었을까. 기억이 나질 않지만 별일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거의 모든 싸움이 그러한 것처럼.
내가 군복무중인 어느날 저녁 핸드폰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우리의 이별을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더 이상 나를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남자가 생겼냐고, 다른 이유가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한들, 아니라고 한들,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든,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그 후 몇 통의 전화가 왔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만들어진 간극을, 메울 자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몇 해가 지났을까. 그녀의 결혼소식을 친구가 전해왔다. 결혼한다고 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구나 하고 안도했다.
소음 가득한 출근길 아침 책상 밑 의자에 앉아 그녀를 생각한다. 나와의 추억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