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린 시절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했단 소식을 듣고, '보러 가야지..'생각만 하며 관람은 미루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간만에 오후에 커피도 마셨겠다, 어차피 밤에 잠도 안 올 테니 '지금이다!' 싶어 심야 영화를 예매했다. 평소엔 심야 영화를 잘 보지도 않는 사람이 말이다. 목도리를 두르고, 귀마개를 꼈음에도 얼굴이 시리도록 추운 겨울밤이었고, 차가 없는 나는 그 겨울밤에 자전거를 달려 영화관에 도착했다. 몹시 추웠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밤과 <이터널 선샤인>은 퍽 잘 어울리니까. 영화는 역시 훌륭했다.('훌륭했다'라는 말은 참 아쉬운 표현이지만) 이번이 아마 세 번째 감상일 텐데도 지루하단 느낌 전혀 없이, 제일 좋았을 만큼. 그런데 웬걸,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와보니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터널 선샤인>과 시리도록 추운 겨울밤, 그리고 러닝타임 107분 만에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 내 스웨이드 운동화는 얼룩지고, 자전거 바퀴는 계속 미끌리고, 얼굴은 시리다 못해 아팠지만, 그럼에도 꽤나 나이스한, 아니, '존나 제일 멋진 밤(best fucking night)'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동진 평론가님의 표현대로 순도 100%의 사랑영화이다. 사랑 영화로써 <이터널 선샤인>의 의미를 짚어내는 데는 이동진 님의 평만큼이나 적절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좋은 글이기에 혹시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꼭 읽어보길.(밑에 평론가님의 블로그 링크를 남겨두겠다) 이 글에선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부분만 인용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랑이 무료함 때문에 시작되고 싫증 때문에 끝나버리는 것일까. 마침내 목적을 이룬 간절함은 짧은 시간 환희로 머물다가 독하고 질긴 권태에 뼈째 잡아 먹힌다. 수명이 다해 길게 누워버린 사랑의 시신을 허다하게 목격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일까. 아니면 왜 형해만 남은 옛 사랑이 못내 그리워 서성이는 걸까."
"무차별적인 권태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결국 남는 것은 사랑했던 이유가 아니라 사랑했던 시간들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 모든 기억마저 사라진 뒤에도 사랑했던 흔적과 습관은 남아 우리의 등을 다시금 떠민다고 말한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그곳이 진창이든 꽃밭이든, 그래, 좋다. 다시 또 한 번."
이동진 평론가님의 글을 한 번 읽고 나면, 도저히 사랑 영화로써의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감상평은 적어낼 수 없게 된다. 이미 완벽한 글이기에 더하거나 뺄 것이 전혀 없고, 내가 어떤 글을 써내더라도 그만큼 적절하게 표현할 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영화로써 감상을 남기는 것은 집어치우고, 그냥 개인적으로, 이번에 유독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본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조엘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도망가는 부분이다. 뭐,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아주 개인적인 이유다. 누군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어린이집을 다녔던 시절과 사랑에 빠졌던 혹은 사랑에 성공했던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두 기억이 영화에 삽입된 어린 시절을 통해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중에선 클레멘타인이 모르는 기억으로 그녀를 데리고 숨기 위한 장치로 어린 시절을 단순히 삽입했을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내게는 사랑의 기억 못지않게 어린 시절도 내 인생의 'Eternal Sunshine'이었다. 구체적인 기억은 모두 휘발됐음에도, 햇살처럼 따스한 느낌만은 오래도록 남아 나의 내면을 계속해서 덥혀주고 있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순간들처럼.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따뜻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온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린 시절이 'Eternal Sunshine'이 아닌, 'Eternal Frost'에 가까웠을 수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아동 학대와 같은 범죄는 정말 용서해선 안될 짓이란 생각이 든다. 그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영원한 햇살을 빼앗는 일이고, 대신 영원한 추위와 결핍을 남기는 잔혹한 일이다. 모든 부모는 혹은 어른은 아이들에게 최고는 못해줄지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의 마음에 'Eternal Sunshine'을 심어줄 수 있도록 말이다. 불행한 아이들의 모습만큼, 마음이 아픈 장면이 없다. 모든 아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다소 엉뚱한 리뷰를 남겨본다.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내가 배경으로 내건 이미지가 어떤 장면인지 잘 알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도대체 왜 '겨울밤의 피크닉'같은 기막힌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까 한탄했다. 나중에 연인이 생긴다면, 온 세상이 꽁꽁 언 겨울밤에 꼭 피크닉을 떠나야지. 마치 내가 생각해 낸 기발하고 낭만적인 아이디어처럼 시치미 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물론 나중에 만나게 될 연인이 나처럼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한다면, 어림도 없을 테지만. 뭐,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이겠다.
▽ 이동진 평론가님의 <이터널 선샤인> 감상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