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스 데 레이로 가는 첫 차이자 마지막 차인
아침 7시 40분 버스를 타기 위해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왔다.
역시, 오늘도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반질반질한 돌멩이가 깔린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아침을 여는 카페의 분주한 움직임은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려준다.
중앙광장에 위치한 '산 후안' 성당 입구 조각상에 씌워진 우산 아래 노란 불빛이
빗물에 젖어 가는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해 준다.
어둠 속에 빗소리만 들리는 광장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여성 순례객들과
어제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던 카페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야무진 처자가 서 있다.
우린 가볍게 모닝 인사를 나누고 서로 목적지를 물어보다 보니
그 처자도 굳이 이 빗속에 걸을 이유가 없지만 마지막 구간은 꼭 걸어서
산티아고 꼼포스텔라 성당 도착 후 향로 미사에 참석하고 싶다고 한다.
우리랑 여행 컨셉이 같구먼...ㅎ
오늘 이동하는 동네도 같고 오랜만에 동포애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도착한 버스 짐칸에 배낭을 싣고
젖은 옷가지를 추스르며 덜컹거리는 버스에 기대어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버스 진행 방향이 카미노 길이라며
걷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내게 친구가 얘기를 건네준다.
버스 불빛이 어둠을 뚫고 달려간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했다
버스에 탔던 승객은 거의 내린 듯하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도시 풍경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이 아침 어디로 가야 하나, 걱정하며 둘러보니
일찍 출발하는 순례객을 위한 카페인 듯
노란 불이 환하게 켜진 카페로
야무진 처자와 함께 들어가 커피와 빵을 주문했다.
공무원 시험 합격 후 임용 시 까지 여행 중이라며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는 처자의 당차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보기 좋다.
앞으로 여행 일정과 정보도 주고 받으며
짧은 만남이었지만
처자의 앞날에 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해 본다.
지금 이 시간
귀는 열고 손은 그림 그릴 수 있는 기회이다.
저널 북과 펜을 꺼내 작고 아담한 카페 내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편에 앉아 있는 보스라 불리는 보이시한 주인 여자를 그려 넣고
그림이 마무리가 될 즈음 주방에서 일하던 청년의 시선이 느껴진다.
미소를 띤 채 힐끔거리던 청년의 눈과 딱 마주치니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한다.
번역기를 돌리며 친구들의 설명을 듣는 청년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카페 세요를 찍고 청년에게 날짜 기록을 부탁하니
웃는 모습의 그림을 그려준다.
청년은 그림을 사진으로 남기고
다 함께 인증샷도 찍고 인스타 친구가 되었다.
선물로 준비해 간 그림카드를 건네주니 너무나 좋아한다.
오랜 시간 앉아 있던 우리에게 눈총 아닌
커피를 새로 내어다 주는 따뜻한 마음에 우리 모두 감동받았다.
보스에게도 감사를......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숙소 체크인 시간이 다 되었다.
모녀가 운영하는 식당 겸 숙소에 짐을 풀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시래기 수프와 렌틸콩죽으로
이른 저녁을 먹으며 스페인 할머니의 손맛에 감탄한다.
어느덧 비는 그치고
비를 머금은 싱그러운 초록빛 잔디와 알록달록한 지붕색이 유럽에 와 있음을 상기시킨다.
멀리 순례객들이 숲속 길을 향해 걸어 가는 카미노 풍경이 이어진다.
마을을 어슬렁거리고, 성당으로, 상점으로 오가며 주민들과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푸짐하게 먹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적당히 소화될 즈음
동생이 미국인이 운영하는 파스타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
평상시 동생의 요리 실력은 뛰어났고, 자신의 음식 솜씨로 사업 구상 중이라
파스타집이 궁금했던 동생의 제안으로 또 한 번의 저녁을 먹었다.
스페인에서는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는데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팔라스 데 레이의 밤은 깊어가고,
이 밤이 아쉬운 우리들은
간간이 보이는 집안 불빛에 의지해
나즈막히 삼중창으로 노래도 하고 히히낙락하며 동네를 걸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추억으로 쌓여갈 페이지를 곱게 만들어 갔다.
잠시 후에 벌어질 일도 눈치채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일어났다.
창문 넘어 빗소리가 요란하건만
친구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도 답답함을 호소해 온다.
친구의 손, 발을 주무르지만 호전되지 않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동동거린다.
급기야 친구는 바늘을 꺼내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었다.
너무 먹어서 탈이 난 걸까......
밤 새 힘겨워 하던 친구는 겨우 잠이 들었다.
지붕 위로 떨어지는 세찬 빗소리만큼 걱정이 깊어진 밤,
밤은 길고 끝내 잠이 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친구의 상태는 호전되었고,
여느 날과 같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아
아르수아로 떠나기 위해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버스정류장을 찾아다니느라 헤매기는 했지만 영험한 촉을 가진 친구의
안내로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던 팔라스 데 레이 마을에서 생겨난 마음들을
감사히 안고 산티아고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일,
부디, 가능한 한,
여행 도중에 아프지 말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