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지역 고양이들과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 열네 번째 이야기 : 보호소 매뉴얼의 진화 2 -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 위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시간성이 중요한 이유다.
만들어진 음식에 시간성이 붙여져 갈수록 발효과정을 거쳐 썩게 되고,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들이 먹고 있는 음식들 대부분은 길지 않은 시간성 덕분에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서는 냉장고에 보관하든 새롭게 요리를 하든 그 위에 새로운 시간성을 덧씌워야 한다.
이문냥이 보호소 매뉴얼도 음식과 다르지 않다. 시간성 위에서 수정하고 보완하지 않았다면 없는 것만도 못한 부패한 매뉴얼이 될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매뉴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입양 관련 매뉴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보내기 급한 마음에 누군가 고양이를 입양하겠다고 하면 바로 수락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만 있을 뿐 고양이에 대한 지식도, 키우는 방법도 모른 채 데려가기만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방송 취재를 왔을 때였다. 연예인들이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일 입양하러 온 사람들을 소개하며 입양을 성공시키는 장면이 있었다. 이때 입양을 했던 사람들은 방송을 탔고, 이날 입양된 미루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미루 입양자는 창틀을 보강해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동두천으로 간 미루는 결국 입양 보름 만에 얇은 모기장을 뚫고 나가버렸다. 입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입양자의 구두 다짐만 받고 사후 확인을 하지 않은 잘못이 컸다. 이문냥이 사람들이 동네를 뒤지다시피 해서 몇 달 뒤 다시 구조하기는 했지만 미루는 이때 다시 길고양이가 되었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더 있었고, 결국 이문냥이 사람들은 입양 매뉴얼을 재정비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아무리 급해도 입양자의 상황, 고양이에 대한 입양자의 정보 수준, 자세, 물품 구비 상태, 창틀 보강 상태 등을 모두 확인한 후 입양을 보내게 되었다. 입양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그만큼 성공률도 높아졌고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도 더 선명해져 갔다.
이제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굳이 청소 등 봉사를 하지 않더라도 약속을 잡고 보호소를 방문해서 아이들과 놀아주며 서로 친해지는 기회를 만든 뒤 서로의 마음속에 들어온 아이를 확인한 후 입양을 진행하게 된다.
입양이 결정되면 이때부터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하게 된다. 방범창 등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입양 갈 아이에 대한 병원 검진이 이루어지게 되고 아이를 데려가게 된다.
입양 후에도 입양자는 온라인을 통해 수시로 입양 간 아이 소식을 올려 이문냥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게 된다. 의무는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입양뿐만 아니라 청소를 하는 방식, 약을 먹이고 케이지를 만드는 방식 등 모든 것이 진화되었다.
입양 간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보호소 공간에 대한 재배치도 이루어졌다. 네트망 골목길이 사라졌고 가운데에는 튼튼한 고양이 타워와 놀이 공간이 마련되었다. 물품 후원을 통해 기존의 작은 네트망 케이지도 더 크고 안락한 철망 케이지로 교체되었다. 치료와 같이 특별히 보호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보호소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했다.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고양이 카페 같다는 말을 한다. 남아 있는 아이가 0이 될 때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어디란 말인가. 이렇게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을 듣는 정도가 된 것이...
비록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자원봉사자의 발길이 끊겨가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변화와 진화와 긍정의 힘 덕분에 이문냥이 공간은 버텨갈 수 있었다.
'까짓것, 40명 정도의 입양자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사료비, 모래값, 집세, 전기세, 병원비 등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오늘도 고단한 의무감이기는 하지만, 그날만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이문냥이 사람들은 그래도, 다시 한번 희망을 꿈꾸어본다. 언젠가는 세상에 흩뿌려질 이문냥이 매뉴얼이 길고양이들과 인간 간의 소중한 공존의 법칙이 되길 말이다.
- (예고) 열다섯 번째 이야기 : 굴러온 돌, 태평이와 동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