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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정 Aug 03. 2023

우울한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내가 우울한 건 알아줘.


   며칠 전 초등학교 5학년 생활기록부를 봤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되도록 좋은 말만 써주시기 때문에 과목에 대한 평은 금방 넘기고,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읽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밝은 학생이라고 쓰여있었지만, 5학년 생활기록부는 달랐다.



스스로 감정기복을 잘 조절하고 밝은 생각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음.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질 생각을 한 시기였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선생님께도 보였을 정도라면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맘때 쯤 나는 일기장에 내가 우울한 이유와 그 감정들을 적어놓고, 부모님이 그것을 발견하길 바라면서 일기 사이에 펜을 끼워놓고 잠에 들거나, 어느 때는 활짝 열어두고 잤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하기를 포기했다.


   여전히 밝지 못했던 중학교 시절, 뉴스가 한 학생의 자살기도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해 이슈가 된 듯 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뉴스를 보고는 "어, 유정이 같은 애네."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에 휩싸였다. 알고도 모르는 척을 했다니, 부모님께 배신감마저 들었다. 성인이 된 지금, 부모님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라 생각은하지만, 그 때 아버지의 행동은 지금에 와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우울한 아이에서 우울한 성인으로 자랐다. 대학 4년 내내 단 하루라도 삶이 행복하다거나 내가 소중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진심으로 해본 적도 없었다. 삶 자체에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슬픔을 가진 나'에 초점을 맞추며 살다보니 속이 답답하기 일쑤였다. 너무 힘들어 숨도 쉬기 힘들었을 때는 오히려 슬픈 영화 같은 것들을 보며 일부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아침부터 숨을 고르느라 몇 분 씩 쓰기도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지인의 경험담을 미루어보았을 때 공황장애가 있었던 듯하다.


   돈이 없던 대학생은 상담 같은 것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돈은 핑계였을 수도 있다. 나는 내 얘기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할지, 일상이 된 우울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너무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리고 내 우울은 상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별 거 아니라는 듯. 내 감정이 그렇게 여겨질까 걱정됐다. 다들 그 정도는 안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암에 걸리기 직전 나는 밝아지고 있었다. 친구가 거의 없던 대학 생활이 새로운 인연들로 채워지고 있어서, 이제 조금 숨통이 트일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상선암 확진을 받고, 겨우 빠져나온 늪이 다시 나를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내가 사실 잘못되어야 할 운명은 아니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또 곱씹었다.


   암수술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빨리 이 실체가 있는 우울을 떨쳐낼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맘 때 쯤 가까운 분들이 두 분 돌아가셨는데, 두 번의 상을 치르고 수술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는 삶에 대한 간절함이 생겼다. 내 주변인들이 나의 일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면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삶의 중요함과 소중함을 깨닫고 나서도 우울한 생각이 금방 그쳐지지는 않았다. 수술 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거나 체력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재활 운동을 하는데 너무 아플 때면 금방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전만큼 과격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마지막 우울은 퇴사 전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병원 권고사항이었던 휴식을 뒤로하고 수술 한 달 만에 들어온 회사에서는, 내 생각과 너무 다른 행보를 걸으려고 한다거나 내가 원했던 업무를 단 한 번도 못하게 된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꼈다. 매일 아침 을지로 입구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에 떠밀려 출근할 때마다 나는 기계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기계의 부속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튕겨지고 있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부품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얼른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 직전, 나는 나에 대해 공부하고 취미로 자기계발서를 읽거나 관련 영상을 찾아보면서 이른바 '갓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학창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어느 날에는 새벽까지 책을 읽거나 블로그를 작성하면서, 나를 채워가는 느낌을 받았다. 인스타툰도 평소보다 더 열심히 그렸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러자 숨통이 조금씩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회사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와 나의 시간을 쏟아부으니, 내 삶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 삶의 주체가 왜 나인지, 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퇴사를 하고나서도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 무얼하든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타인이 나에게 정서적인 공격을 가하더라도 나는 꼿꼿했다. 순간 상처를 받을지언정 자책까지 넘어가지는 않았다. 이런 일상이 쌓이다보니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됐다.


   약 20년 간의 우울을 벗어던졌던 그 순간은 일시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울로부터의 해방이자 독립이었다. 잠깐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침울하더라도 그런 나의 모습을 인정하되 그 모습을 나로 정의하지는 않으니 완전히 슬픔에 빠지는 일도 줄었다. 이런 경험들을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졌다. 일상 만화를 그리던 나는 '자기계발과 자기애'를 주제로 삼아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꾸준히 올리니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를 얻는다는 말을 했다. 여러 번 그런 반응을 보면서, 나는 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침 브런치에 작가로 등록이 되었고, 이제 그림보다 자세한 글로 우울했던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아무런 의학 지식도 없지만, 경험자로서, 내가 기나긴 터널에서 벗어났던 방법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당신의 터널에서 걸어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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