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며 마주하는 너의 우주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니까

by 한 자 이상

회상 - 산울림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귀에 들리는 박자에 맞춰 까딱 거리며 걷는 것이 은근 재미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걷다 보면, 음악이 나고 내가 음악인듯 자아도취의 지경에 빠진다. 중학교 때 처음 mp3를 산 이후 생긴 취미이니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취미다. 특히 고3 시절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친 후 40여분 하교 길 보행은 지옥같았던 입시를 겨우 버티게 해준 취미생활이었다. 타인이 볼 때는 엉거주춤 하는 모양새가 꽤나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타인을 그닥 신경쓰지 않는 성격 덕에 10년 넘게 이 취미를 유지 중이다.


문제는 MP3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힙합에 빠졌다는 것이다. 빠른 호흡의 힙합 박자에 맞춰 발걸음을 내딛다 보니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게다가 십 수년을 그렇게 걸어 왔으니 다리는 이미 빠른 걸음에 적응했다. 짧은 다리임에도 긴 다리를 보유한 친구들보다 앞에서 걷고 있을 때도 많다. 최근 보폭 테스트를 정식으로 받아 봤는데평균 성인 남성보다 최소 3단계는 빠른 걸음을 갖고 있었다.


빠른 걸음 덕에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생애 첫 소개팅이었다. 반주 곁들인 식사를 마친 후 한강 둔치를 산책 중이었다. 별 생각없이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산책이 끝날 쯤 그녀에게서 들려온 말. “원래 걸음이 이렇게 빨라?” 그 말을 들은 후 그녀의 모습을 보니 삐질삐질 나오는 땀과 함께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결국 생애 첫소개팅은 좋은 유산소 운동으로 마무리됐다. 이후부터는 누군가와 함께 걸을때는 상대와 보폭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그녀에게 사과를 전한다.


누군가와 함께 오래 걷기 위해서는 느린 사람의 속도에 맞춰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됐다. 내가 빨리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앞서 나가면 그것은 동행이 아니라 혼자 걷는 것일 뿐이다. 결국 대부분은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자기 갈 길만 가는 빠른 사람을 향한 느린 사람의 원성은 덤이다.


그럴 바에는 느리더라도 충분히 풍경을 즐기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함께 걷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진다. 천천히 함께 걸었을 때에만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우주도 있다. 함께 걸으며 눈을 마주치거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그 사람의 우주다. 그렇게 마주한 우주들이 차곡차곡 쌓여 더 다양한 나의 우주를 만든다.


어차피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한다면 서로의 우주를 받아 들여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우주를 가진 개인들이 이룬 사회를 막연히 꿈꿔본다.



위 글은 제가 발행하는 음악 에세이 뉴스레터의 글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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