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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Sep 08. 2024

영화 우리들을 보고 24년간 미워한 그 친구를 용서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며칠 전, 국어시간. 반 아이들과 1단원에 나오는 영화 우리들을 무심결에 보다가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일이 심연 위로 불쑥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들이 친구관계에서 겪는 갈등을 다룬 영화. 처음엔 그들만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가볍게 보다가 한 장면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장면은 바로, 친한 친구의 지아의 1등을 목격하고 그 이후 친구를 외면하고 따돌리기까지 하는 한 여자아이 보라의 모습이었다. 영화 속 보라라는 인물은 늘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고 외모도 뛰어나 친구들을 여럿 거느리고 다니며 반에서 주목받는 아이였다. 하지만 전학 온 지아라는 존재가 자신의 1등을 단숨에 빼앗아가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차갑게 외면해버린다.


 아이들이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기 때문에 악마처럼 악랄하고 잔혹한 데가 있는데 그 면모를 보라라는 인물이 잘 보여준다. 나는 그 보라의 모습에서 수 년전 단짝이었던 한 아이가 겹쳐보였다.


중학교 첫 입학식날, 헐렁한 교복을 입고 삭막한 중학교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던 내게, 초등학교 6학년 내내 단짝이었던 그 아이가 내게 와서 “우리 같은 반이야”라고 밝게 외치던 순간. 삭막해보이던 중학교 건물이 단숨에 핑크빛으로 물든 느낌이었다. 1년 내내 단짝으로 지내며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던 우리였기에 같은 반이라는 소식은 별다른 의심없이 그 기간이 연장된다는 말과 같았다.


그 아이 덕분에 다른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아도 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었고, 우리는 늘 그랬듯 점심시간,쉬는시간,체육시간 그리고 하교시간에도 늘 함께하며 서로의 모든 일상을 공유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첫 중간고사 결과 발표날이었다. 평소 공부를 나보다 잘하던 그 아이는 며칠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선생님의 입에서 전교 1등의 주인공으로 내 이름이 불리던 순간. 그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 때 나를 향하던 그 싸늘하고 따가운 시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나는 하루 중 가장 달콤하던 점심시간이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으로 바뀌었다.


 한 번은 책상 안에서 교과서를 꺼내다 바닥으로 종이가 하나 툭 떨어진 적이 있었다. 연습장 위에 빨간 글씨로 적힌, 아직까지 내 마음 속 깊이 날카로이 각인된 빨한 문장. “너는 일주일 안에 죽~~”. 자주 주고 받던 편지를 통해 너무도 익숙해진 작고 동글하던 글씨체. 그 아이의 짓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왜 그랬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아 종이를 구겨 조용히 쓰레기통에 넣으며 혼자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손에 컵 떡볶이를 들고 늘 함께던 하교길을 빈손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으며 내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외모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엄마가 피아노 선생님이라 늘 주목을 받던 반짝이던 그 아이. 같은 반에 아는 친구가 없어 쉬는 시간에 혼자 책을 보던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주던 그 날.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는 비밀일기장을 만들어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들을 공유하며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삼남매 중 첫째인 내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따듯한 위로도 잘 해주던 그 아이. 맑은 수채화같던 초등학교 시절 그 아이와의 추억은 내가 전교 1등을 한 이후, 검은 잉크가 떨어져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그 아이는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아물지 않을 빨간 생채기를 남기고 홀연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중에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피아노 학원을 하던 엄마의 사업이 잘 안되어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다른 곳으로 쫒기듯 이사를 갔다고 했다. 영화 속 보라를 보며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가 그 아이를 깊이깊이 미워했다.


그러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나는 잠시 얼어붙고야 말았다. 보라가 1등을 빼앗긴 그날, 아무도 없는 학원의 빈 교실에서 엎드려 울고 있는 보라의 모습이 주인공 선이라는 아이의 눈에 비쳐지는 장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던 보라가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악독해 보이는 저 아이도 속은 한참 여린 아이구나.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늘 1등의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구나. 영화 내내 유지하던 보라에 대한 적대감이 연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등을 놓친 보라가 학원에서 울던 장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1등을 유지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고 생각해 기를 쓰며 공부했을 아이. 그래서 친한 친구의 1등을 달갑게 여기지 못했을 그 아이의 심정. 그 장면 하나로 보라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 스트레스를 친구를 왕따시키는 것으로 해소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말이다. 그런 보라를 보며 이상하게 내 가슴에 꽉 막힌 응어리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 시절의 그 아이도 보라와 같은 심경이 아니었을까? 늘 완벽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편치 않은 날들을 보냈을 그 아이. 내 고민은 곧잘 들어주었으면서 자신이 가진 고민은 편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려고 했던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이 갑작스레 샘솟기 시작했다. 그 어린 소녀가 갑작스레 닥친 집안의 힘듬을 오롯이 감당해내며 단짝의 1등을 편히 바라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이들과 함께 집중해서 본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동안 나는 남모르게 혼자서 분노가 일고, 그리고 또 한 순간에 그 분노가 연민으로 바뀌며 마음 속에 난 빨간 생채기가 옅어지는 과정을 경험해갔다. 단순히 영화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하고, 또 지독히 미워했던 그 누군가를 용서하고 돌아온 값진 시간을 보냈다.


영화 우리들.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싶은 영화다. 영화 속 등장하는 선. 지아. 보라. 각자 품은 사연을 다르지만 이 영화를 보며 나처럼 그 시절 미워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또는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과거를 돌아보고,또 누군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용서할 수 있는 치유의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며 입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한자어로는 설 입에 장소 장. 서로의 입장에 서서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깊이깊이 누군가를 미워했던 내가 영화를 보며 그 아이의 입장에 서서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며 용서한 것처럼. 과거에 받은 상처로 아직 마음 속에 빨간 생채기가 남아있다면, 그 누군가의 입장에 서서 잠시나마 이해한다면 상처가 옅어지지 않을까?


갑자기 그 아이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 아이도 언젠가 우리들 영화를 보고, 그 시절의 우리를 가만히 떠올려보아 주기를.

선과 지아가 우정을 나누는 장면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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