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날이라 여기면 비로소 알게되는 진심
오늘이 내게 마지막 날이라면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은가요?
얼마 전 국어시간, 편지쓰기 단원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불쑥 던진 질문이다. 그 질문에 26명의 아이들은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글씨로 쓰인 당신은 지금 천국으로 떠나야 합니다 라는 화면을 띄우고 잔잔한 선율의 음악을 배경화면으로 깔아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트무늬가 인쇄된 편지지를 한 장씩 뒤로 넘기도록 했다. 내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아이들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편지쓰기에 돌입했다.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금새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난스레 내게 “선생님 우리 죽은거예요?”하며 히죽대던 한 남자아이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무언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교실 안은 딱딱거리는 연필소리만이 그 공백을 메웠다. 평소라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기다렸을텐데 몰입하는 아이들의 고개숙인 모습에 나도 함께 동참하고야 만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마음 깊숙이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고 마치 펜에 날개가 달린 듯 술술 막힘없이 써내려갔다.
30분여쯤 지났을까? 여기저기서 편지의 완성을 알리는 신호가 터져나왔다. 아이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첫 번째 주자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쓴 편지를 낭독해주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라고 운을 떼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고 나의 먹먹한 목소리를 감지한 몇몇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의 행간행간마다 몇 차례의 울음을 삼켰는지 모른다.
아들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가닿았는지 교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마무리, 엄마가 없어도 지금처럼 씩씩한 아들로 자라고 엄마는 천국에서 아들이 꿈을 이루는 순간까지 응원할 것이며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로 태어나달라,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 순간 교실의 공기는 묘하게 바뀌었고 나포함 26명의 아이들은 모두 천국으로 가는 배에 함께 오른 동지가 되었다.
진실한 내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아이들에게로 연결되었는지 아이들의 편지는 하나같이 먼지하나 끼지 않은 투명한 진심으로 가득 채운 내용 일색이었다.
그 중 가장 내 마음을 울린 아이의 편지는 단연코 우리반 장난꾸러기 한 남자아이. 학기 초부터 지금껏 바람잘날 없이 지적을 받고,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켜온 그 아이는 늘 내 가슴 속에 돌멩이처럼 걸려 있는 아이였다. 얼마전에도 친구의 자전거를 부신 문제로 상담전화를 한 적이 있는 아이다. 행여나 또 장난스러운 발표를 하지 않을까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를 응시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로 시작한 아이의 편지. 오늘 떠나는 날까지 사고만 치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이 입밖에서 흘러나오자 아이들과 내 눈빛이 일제히 아련해지기 시작한다. 얼마 전 친구의 자전거를 부시고, 체육관의 에어컨을 넘어뜨리는 그런 나쁜 짓을 해도 부모님은 나를 포기 하지 않고 혼내주어 감사하다. 그리고 선생님들한테 전화를 많이 받게 했는데 자신이라면 힘들고 창피할 것 같다며 엄마아빠 잘못도 아닌데 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엄마가 혼낼 때 마다 밉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사랑했다고. 효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고 다음생에는 착한 아들로 태어나 효도 많이 하겠다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늘 장난으로 일갈하던 그 아이의 생각지도 말간 진심에 모두가 적잖이 놀란 기세였다. 편지를 읽는 내내 나는 떨리는 아이의 손을 보며 그간 생각없이 사고만 치고 반성하는 기색없는 괘씸한 아이라고 오해한 지난 날의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참 고마웠다. 깊은 심연에 숨은 속마음을 가감없이 수면 위로 드러내주어서. 그리고 그 진심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겨주어서. 자칫하면 4학년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 아이를 대할 때 쓴 잿빛 안경을 드디어 벗길 수 있게 해주어서 말이다.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프레임이 아이의 심연에 깊숙이 숨겨둔 속알맹이같은 진심을 투명히 드러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 셈. 다소 무거운 주제라 수업 직전까지도 고민했었지만 과감히 실행한 내 자신을 폭풍 칭찬해주고 싶었다. 아이의 발표에 물꼬를 튼 다른 아이들도 너도 나도 자신의 속알맹이 같은 진심을 드러내었고 그 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엔 전에 없이 뜨듯한 무언가가 가득 차올라 가뜩이나 여름의 열기로 후끈한 교실을 더욱 훈훈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오늘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편지를 쓴 이 순간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온전히 우리 만의 밀도 있는 시간이었고, 또 생의 마지막 순간 떠오른 누군가는 바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평소엔 미움 귀찮음 성가심이라는 현실의 먼지에 쌓여 보이지 않지만 그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음을 말이다. 이 활동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의 인생을 살 때 필요한 귀한 힌트를 하나 얻은 셈이다.
수업을 하고 나니 불쑥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언젠가 본 한 티비프로그램. 연예인 션이 등장했던 부분인데 한 진행자가 어떻게 그렇게 아내에게 한결같이 잘하냐 라는 질문에 션은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내게 허락된 시간이 오늘 뿐일 수도 있는데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사소한 일로 싸우고 미워하면 얼마나 후회할까? 사랑하기도 부족한 오늘이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며 살겠다“라고. 그 말이 아직까지 가슴에 콕 박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그 하루가 덧없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때, 그리고 곁에 있는 가족의 사랑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질 때. 그래서 그 가족이 너무 귀찮고 미워질 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 국어시간에 모두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린 아이의 편지 내용처럼, 당연한 것을 감사하게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속알맹이 같은 진심이 불쑥 드러나 미움이라는 한낱 감정을 무기력하게 만들테니 말이다.
곧 다가오는 추석 명절, 모두가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슴 한 구석에 장착한 채 자주 못뵌 그리운 가족들을 찾아 농밀한 시간들을 보내며 평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듬뿍 전하는 따뜻한 명절을 보내기를 바라며.
#편지
#오늘이마지막날인것처럼
#마음을담은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