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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Dec 27. 2023

매일 쓰는 이 사소한 한 줄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일년동안 반아이들과 함께 쓴 감사일기로 얻은 것들

 2023년의 끝자락, 올 한해를 돌아보며 내가 가장 잘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것이다. 바로 매일 감사일기 한 줄. 이 감사일기의 시작은 바로 복직 전, 어느 도서관에서 우연히 빼들어 읽은 책에 나온 감사일기의 효용성때문이었다.  신기루처럼 그 내용을 접한 뒤 학교가서도 매일 적용해봐야지 라는 작은 다짐에서 시작된 이 감사일기는 3월 첫만남부터 지금껏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이어져왔다. 12월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 아이들의 알림장엔 무려 200여개 남짓의 감사일기가 쌓였다.


 처음 감사일기를 쓰고자 마음 먹었을 땐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괜한 짓 하는게 아닐까? 라며 마음 속에 의문을 잔뜩 품었었다. 손으로 쓰는 알림장 대신 알림장 앱을 이용하는 요즘 시기에, 가뜩이나 글을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알림장을 매일, 그리고 마지막 감사일기까지 한 줄 덧붙여 쓴다는 것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첫날 아이들에게 감사일기를 써보자 제안했을 때 그게 뭐냐는 27개의 뾰족한 눈빛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쏘아댔다.


”선생님 전 감사할게 없는데요?“, ”매일 똑같은 하루라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예상했듯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볼멘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찬찬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 얘들아 오늘 하루를 떠올려봐, 첫날이라 긴장했지만 무사히 하루를 보냈지? 사소해보이지만 이것은 참 감사한일이야. 그리고 너희 1학년 때 생각해보렴. 코로나가 한창이라 입학식도 온라인으로 하고 친구들도 못보고 얼마나 힘들었니. 이렇게 학교에 올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란다”


 불만으로 가득하던 교실 안이 잠시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알림장 말미에서 연필만 굴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연필소리를 딱딱 내며 쓰기 시작한다. 그날의 알림장 감사일기는 죄다 “학교에 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였다. 그 한 줄이라도 어디냐며, 처음은 늘 힘든 법이니까. 점차 나아지겠지 라며 아이들을 다독이며 매일 감사일기를 지리멸렬하게 이어왔다.


 한 달여쯤 지나자 아이들의 감사일기엔 눈에 띄는 변화가 찾아왔다. 늘 “학교에 올 수 있어서 감사”라는 피상적인 내용이 즐비했던 감사일기가 점점 일상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여태껏 또렷이 기억나는 한 아이의 감사일기는 “엄마가 아침에 학교에 늦지 말라고 매일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였다.

 평소 엄마 아침에 깨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짜증내던 00이는 감사일기를 쓰다보니 그 또한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리고 “아침에 비오는 데도 교통봉사를 해주시는 녹색어머니들께 감사합니다.”라고 써온 아이의 일기에선 누군가의 봉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따뜻함과 세심함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일 년간 감사일기를 이어오며 내가 느낀 효과는 세 가지 정도였다. 먼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갑작스레 간암 4기 판정을 받고 돌아가신 친한 친구 아버지의 문상을 다녀와서 아이들에게

“얘들아 오늘 아침에 우리가 눈을 뜨고 이렇게 학교에 와 숨을 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 어제 돌아가신 선생님 친구 아버지는 오늘 하루 얼마나 눈을 뜨고 싶으셨을까?”

그 말이 끝나자 천진난만한 27개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해갔다. 그날 우리 반 감사일기는 대부분 “오늘 하루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아프지 않고 학교에 와서 공부해서 감사합니다” ,“ 부모님이 건강히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였다. 그 시점으로부터 아이들은 숨을 쉬는 것, 두 발로 안전히 걸어다니는 것, 아프지 않고 학교에 온 것, 부모님이 내 곁에 살아계신 것 등 그 전까지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감사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바로 삶에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2학기 들어 우리 반에는 두 가지의 작은 소동이 있었다. 급식시간, 두 친구가 장난을 치며 올라오다 뒤에 올라오던 우리반 부회장이 바로 앞의 00이를 슬쩍 밀었는데 앞의 00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져 계단에 머리를 부딪힌 것.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사색이 되어 보건실에 내려갔다. 갖은 무서운 상상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보건실 문을 열었다. 다행이도 아이는 외관상 크게 다치지 않아보였다 . 보건선생님말씀으론 이정도면 괜찮다고, 다만 좀 놀랬을 뿐이라고 했다. 혹시 모르니 부모님께 연락해서 상황설명 후 지켜보라고 당부하셨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친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로 올라왔다.


 아이의 상태를 보고 마음이 놓이자,갑자기 속에서 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계단 안전지도를 늘상 해왔지만 가뿐히 그 말을 무시한 채 장난을 쳐 크게 다칠뻔 한 아이들에게 솔직히 괘씸함이 들었다. 또한 다친 아이의 학부모님께 고개를 조아리며 연락할 생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기도 했다. 그런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그날따라 감사한 일을 쉽사리 쓰지 못했다. 몇 분째 애꿎은 커서만 깜빡거렸고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일순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잠시 뒤 아이들이 하나 둘 알림장 검사를 맡으러 나왔고 우리반 회장아이를 비롯 너댓명 아이들이 써온 감사일기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오늘 사고가 있었는 데 00이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 나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집중했는데 아이들은 많이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니. 긍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그 사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어난 사건은 어쩔 수 없을진대 나는 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춰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눈덩이처럼 불렸던 것.


 그 한줄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던 때가 아직도 또렷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다행인건 전화를 받으신 학부모님께서도 침착히 상황설명을 들으시고 가정에서도 주의를 주겠다고 하셨고, 그 사건을 교훈삼아 아이들은 더 이상 계단에서 장난치는 일은 없었다.


세 번째는 바로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학기 말, 갑작스런 체육 선생님의 병가로 내가 감당해야 할 수업시간이 늘어났고 ,출근하면 빼곡이 쏟아지는 업무량에 허덕이며 힘겨운 하루를 보냈다. 결국 목감기를 동반한 몸살이 나를 덮쳐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대체인력이 부족한 학기 말,병가를 내기도 눈치보이는 상황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핑그르르 도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5교시 풀수업을 겨우 마치고 알림장을 쓰는 시간. 우리반 일기왕 00이가 쓴 감사일기에 눈 앞이 뿌얘졌다.


 ”오늘 선생님이 아프신데도 5교시 수업을 열정적으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그 한 줄은 그날 아침에 먹은 감기약보다 더 큰 치유효과가 있었다.

 다음 날, 평소보다 가뿐한 몸으로 출근해 아이들에게 전날 00이가 쓴 감사일기를 들려주며 “선생님 어제 00이의 한줄이 감기약처럼 효과를 발휘해서 오늘 무사히 출근을 했어. 너무 고마워” 라는 말로 아침을 열었다. 그랬더니 우리 반 학생들의 그 날 감사일기는 복사 붙여넣기 한 듯 선생님에 대한 감사였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날 국어 수업을 듣고 느낀 위인에 대한 감사,“선행을 베푼 김만덕님 감사합니다”, 한글날에는 “우리말과 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님께 감사합니다” 등 자신과 심적 물리적 거리가 있는 위인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일 년간 감사일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결과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전 같았으면 힘겹게 발을 떼던 학교 출근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체감했다. 매일 반복되는 학교생활애서 억지로라도 감사한 일을 한 가지씩 찾아내어 알림장 끄트머리에 쓰고,반 아이들의 알림장에 꾹꾹 눌러쓴 감사 한줄은 피로를 깨우는 커피 한 잔보다 더 큰 효력을 발휘해주었달까.


 반분위기도 전에 없이 밝아졌다. 학기 초 소위 금쪽이라 불리는 두 아이들이 있어 크고 작은 다툼으로 늘 소란이 끊이지 않던 교실이 ,2학기 들어서는 그 아이들조차 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노는 장면이 자주 포착되었고 그로 인해 교실 안을 흐르던 차가웠던 공기가 어느새 따뜻하게 바뀌어갔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유도 있겠지만 27명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매일 한 줄 꾸준히 써온 이 감사일기 덕분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감사일기 한 줄을 쓰며 당연한 것에도 감사하고,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보게 된 아이들. 그 어떤 것 보다 아이들을 변하게 하는 정말 가성비 좋은 한 줄이 아닐까? 복직 전, 작은 결심을 이어나가준 3월의 내게,그리고 잘 따라와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마구 일었다.


 12월 22일 ,조금 있으면 설레는 방학을 목전에 앞둔 23년의 마지막 알림장쓰는 시간. 어떤 근사한 감사한 말을 아이들에게 남길까 머리싸매고 수차례 고민하던 차, 벌써 알림장을 다 써서 들고 온 우리반 수학왕 00이의 감사일기에 가슴에 무언가 뜨끈한 것이 차올랐다.

“선생님과 함께 한 매일매일이 감사했어요, 방학 잘 보내세요” 그 문장을 보는 데 지난 일년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반짝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응시한 뒤 빨간색연필로 왕별을 여러개 그려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주었다.


 그 한 줄에 영감을 받은 나는 깜빡이는 커서에 누구보다도 빠른 손놀림으로 그날의 감사함을 쓴 뒤 아이들과 환호성을 지르며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늘 감사함을 꾸준히 표현해준 예쁜 1반과 함께 한 매일매일이 감사했습니다.”

주말에도 알림장앱을 통해 이어가는 아이들의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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