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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10. 2024

37년만에 발견한 이것, 정리에 자신감이 생겼다

심신이 지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 해야하는 건 바로 정리정돈.

 나는 정리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 손길이 닿는 서랍장 속 물건들은 순식간에 하나로 뒤엉켜버란달까.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에 물러나있지만 학창시절 내 별명은 덜렁이였다.


  별명에 걸맞게 책상은 늘 교과서와 문제집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먹다 남은 간식쓰레기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기 일쑤였다. 그 습관은 학교로까지 확장되어 주인 잘못 만난 내 책상 서랍 속은 늘 삐져나온 책들, 구석에 쳐박힌 학습지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나로 인해 엄마는 늘 노심초사하며 나의 등교길을 배웅하시곤 했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뒤꽁무니에 대고 “미야,또 놓고 가뿟다 얼른 가지가라” 말할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직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오는, 아직까지도 엄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대학 면접고사날, 신분증을 집에 놓고 왔다는 딸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엄마아빠가 급히 동사무소로 뛰어들어가 팩스로 신분증 사본을 보낸 사건이다. 그때 엄마아빠의 기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으려나.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저어진다.


 그렇게 숱한 고비를 아슬하게 넘기며 37년을 살아오면서도 큰 경각심이 없던 나는 ,여전히 정리정돈엔 소질이 없다. 두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게 된 지난 해에는 조금씩 해오던 눈꼽만큼의 정리정돈 마자도 여력이 없어손을 놓게 되었다.


 집 현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아일랜드 식탁은 아이들의 학습지, 가정통신문, 진단서 약봉투 등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식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내 방 옷장은 아무렇게나 걸린 옷들과 바닥에 마구 놓아져 한데 뒤엉켜 하나의 옷산을 만들었으며, 냉장고는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과 먹다 남은 반찬들이 뒤죽박죽 자리를 차지했고, 펜트리는 문을 여는 것 조차 두려운 그야 말로 잡동사니가 가득 채워진 먼지쌓인 잡화점으로 전락했다.


 그래서인지 일터에서 돌아와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할 집이 어느새 피하고 싶은 장소로 전락해버렸다. 특히나 일에 지쳐 퇴근할 때면,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닌 동네 카페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매일 하루를 보내던 내게 최근 정리를 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생겼다.


 바로 두달 앞으로 다가온 이사.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상황에 마음을 굳게 먹고 정리를 하기로 결심했다. 늘 거슬렸지만 애써 모른척 해왔던 장소 1순위는  바로 부엌과 거실 사이의 아일랜드 식탁. 4년전, 이사올때만 해도 이 식탁 위에 꽃병을 놓고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겠노라 생각하며 빙그레 웃음짓던 그곳, 불현듯 그때로 다시 돌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우선 아일랜드 식탁위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방치된 불필요한 물건들을 죄다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물건들. 문구류,연고,지금 복용중인 약들을 수납함에 용도별로 가지런히 놓았다. 유치원에서 받아온 아이의 사진이 들어간 작품들은 파일에 차곡차곡 넣어 정리하고, 사용 빈도가 낮은 물건들은 아래의 수납장에 정리해 넣었다.


 그렇게 내 손길을 거친지 십여분이 지나자 지난 4년간 형체를 숨기고 있던 아일랜드 식탁이 뽀얀 낯빛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자 복잡하게 얽혀 있던 내 속도 일순 개운해짐을 느꼈다.

정리 후 아일랜드 식탁 모습. 그 전엔 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정리 산을 넘고 나니 다음 산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바로 4층짜리 부엌 펜트리장. 각종 생필품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찾으려고 하면 물건들이 꼭꼭 숨어들어가기 좋은 숨바꼭질 장소가 되었다. 며칠 전, 그곳에서 남편이 치약을 찾다 한숨을 내쉬며 급히 편의점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사오는 일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1 층부터 4층까지의 물건을 모조리 꺼내 바닥에 다 늘어놓았다. 불필요한 물건은 제거 후 남은 물건을 품목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욕실용품, 주방용품, 영양제, 아이들 관련 용품으로 나누고 흰색 수납함에 각각 넣어 자주 쓰는 물건은 2,3층에, 가끔 쓰는 물건은 가장 윗층인 4층과 1층에 가지런히 놓고 정리했다.


 정리를 하면서 각종 새 칫솔, 비누, 손세정제가 뭉텅이로 발견되는 걸 보며 ”미리정리를 했더라면 치킨 두마리값은 벌었을 텐데“라며 탄식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정리 후 마트처럼 품목별로 정갈히 놓인 4층짜리 펜트리를 보니 비좁은 공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물건들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늘 여유없이 꽉찬 내 마음에도 빈공간이 들어찬 순간이었다.


 그 다음으로 내게 정리의 손길을 내민 곳은 바로 냉장고. 유통기간이 한 참 지난 우유,음료수, 각종 가공식품은 다 버리고 나중에 먹으려다 조금씩 남겨뒀지만 손도 대지 않은 반찬들은 과감히 음식물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자주 꺼내먹는 반찬은 손이 잘 가는 곳에 두고 고추장 간장 다진마늘 된장 등 자주 사용하는 양념통은 수납함을 사용해 같은 층에 나란히 두고 김치나 무거운 물건은 가장 아래에 두었다.  빨리 소비해야 할 야채들은 야채칸 맨 앞에 정리해서 넣었다.


늘 요리를 할 때 마다 식재료나 양념장을 바로 찾지 못해 애먼 남편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언제 산지도 모를 야채나 고기가 소비기한이 지나 급히 배달어플을 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적재적소에 배치된 그것들을 바로 찾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났다.


  그렇게 냉장고 산을 넘은 뒤 남은 건 바로 가장 내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옷장산. 출근시간만 되면 제때 옷을찾지 못해 아까운 아침시간을 잡아먹는 곳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옷장을 열면 마주하는, 과거의 내 게으른 손이 매일같이 만들어낸 옷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옷이 한데 엉긴 그 산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늘 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로 인해 한철 입을 값싼 옷을 사들이고 다시 옷산의 부피만 늘려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아침마다 옷과의 전쟁으로 둘째 아이 머리도 제대로 못묶여 나간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나는 결단력을 발휘해 옷정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먼저 옷장의 옷을 바닥에 죽 늘어놓았다. 옷이 이렇게나 많았나하는 생각에 갑작스레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 충격이 일었다. 옷이 없다고 불평하며 사모으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우선 유행이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늘 내 레이더망에서 벗어난 몇 년 묵은 옷들을 과감히 버렸다. 철이 지난 옷들은 옷걸이에 걸어 다른방 붙박이장에 정리해서 넣었다.  다음엔 옷을 용도별로 정리했다. 외투,상의,하의,원피스 순으로 정리를 하고 얼마 전 이케아에서 산 나무옷걸이에 차곡차곡 걸었다.


 상의는 색깔 별로 정리해서 나란히 걸었고 하의 중 스커트는 길이별로 집게에 걸었고 청바지는 돌돌 말아 아래쪽 서랍에 세로로 넣었다.  보기만 해도 한숨을 내게 하는 옷장이 어느새 얼마 전 한남동에서 본 한 옷가게의 쇼룸처럼 근사해져 있었다.


 한결 정돈된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더 이상 바쁜 아침 시간에 옷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새옷을 사는 데 뭉텅이로 나가는 돈도 아끼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옷장을 열며 더 이상 한숨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정리정돈이 내 손끝을 거치며 약 세시간여 후 대망의 막을 내렸다. 세 시간 가량 정리를 하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바로 정리안된 공간들이 그간의 내 마음과 꼭 닮아있다는 점이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둔 집안정리처럼 늘 바쁘다고 내 마음 또한 정리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한 날들. 집안정리와 함께 그것들도 함께 정리된 기분이었다.


 수납장마다 마구잡이로 늘어져있는 잡동사니들과 옷들을 너른 바닥에 널어놓고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용도에 맞게 분류해 정리하는 과정 속에서 내 머릿속을 복잡다단하게 채우는 잡념들도 함께 밖으로 내어 내게 유해한 것들은 제거하고 내게 무해한,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져 마치 막 샤워를 한 듯 상쾌했고 홀가분함 마져 들었다.


 바쁘고 정신없을 수록 정리정돈을 미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때 일수록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정리정돈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고 정돈하는 것을 떠나 내 마음을 꽉 채우는 잡동사니를 치우고 내게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만 남겨 빈공간을 남기는 의미있는 작업이기도 하므로...


 정리 정돈을 하고 나서 내게 생긴 두가지 이점은 바로 언제든 내가 필요한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 어지럽혀진 공간을 정리하듯 내 자신도 언제든 정리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통제감이 었다.  


그외 또 하나 깨달은 사실 한가지. 나는 정리정돈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소질을 내 몸 깊숙이 꽁꽁 숨겨두고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것. 인생 37년차에 겨우 발견했다는 사실이 통탄할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내 인생은 정리로 인해 더 활기와 생기가 돌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그런 정리소질이 퇴근 후 지쳐 돌아온 남편의 어깨가 활짝 펴지고, 하원 후 집으로 돌아온 아이의 표정이 한껏 밝아지는, 그리고 퇴근길의 내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집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꿈꾸며 아일랜드 식탁 위 우유팩을 버리며 가뿐한 아침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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