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Grow up

[Career] 이제는 국제전문도슨트 최지원!

Career 일지 취미일지 여전히 모호하지만, I made it!

by Choi 최지원


생각을 멈추게 하는 예술에 빠져 전시장을 들락날락하며 시공간이 무의미해지는 그 낯선 감정 속에서 기운을 얻었다. 그리곤 차츰 마음이 향하는 작가와 작품, 선호랄게 생겼다. 덩달아 우리 집 벽 한 켠에 두고 싶은 욕망이 생겼고, 자연스레 아트테크 세계에도 발을 들였다. 하지만 예술의 도둑 책을 읽고 소유욕의 위험성을 깨닫고난 뒤, 내 관심은 갖고 싶은 미술품에서 작품의 흥행 이유를 탐구하는데로 이동했다. 단순히 "좋다", "아름답다"를 넘어서,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연결되고 파급력을 갖게 되었는지, 그 전략적 흐름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예술을 "본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통해 메세지를 "전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이 질문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고, 정답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답을 찾기 위해 도슨트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호기심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


그렇게 장장 15주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역삼에서 고려대, 그리고 다시 항동까지 고된 여정을 해냈다. 멀고 고된만큼 작품을 향한 시선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국제 전문 도슨트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I made it!



그렇다면 ‘도슨트’는 무엇일까.

내가 정의하는 도슨트는 작품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을 스스로 음미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안내자가 아니라, 감상의 방향을 제시하고 감각적 경험을 촉진하는 조력자에 가깝다.


도슨트가 알아야 할 여러 이론적 기반 중, 나는 수전 손택과 롤랑 바르트가 공통적으로 주장한 관점에 특히 공감한다. 두 이론가는 작품 해석에서 작가 중심의 접근을 경계하며, 작품 자체를 독립된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과도한 해석은 예술 경험을 방해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작품이 주는 감각적/직접적 경험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 역시 저자의 죽음을 통해 의미 형성의 주체를 작가가 아닌 작품과 독자로 확장하며, 텍스트가 스스로 의미를 생산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두 이론은 공통적으로 작가의 생애정보나 의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가 제시하는 시각적 단서, 구조, 감각을 중심으로 감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유한다. 따라서 도슨트의 역할은 작품 뒤에 숨은 배경지식을 열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도록 안내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도슨트가 제시하는 해석이나 시대적 배경 역시 작품 감상을 위한 하나의 촉발점일 뿐,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답과 선택을 요하지 않는 것이 예술의 미덕이니 그 미덕을 꼭 즐겨보시기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여전히 작품을 시대적 맥락과 작가의 사상을 통해 해석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감상에 정답이 없듯, 이것 또한 감상자인 내가 선택한 해석 방식이니 충분한 가치가 있지. 무엇보다도 개별 작가의 미적 표현을 넘어, 시대 의식과 시장 구조, 관습의 전복, 관람자의 욕망 등 작품 뒤에 숨은 기획과 전략을 읽어내는 데 흥미를 느낀다.


한 작품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 서울에 사는 나에게까지 도달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탐구하고 싶다. 그래서 작품을 더 넓은 시각과 맥락 속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도슨트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언젠가, 관객이 작품 앞에서 한 번쯤 멈춰 "why"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안내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지금 말고.. 지금은 본업이 아주 아주 재밌음!)




이번 도슨트 수업으로 다시 보게 된, 그리고 애정하게 된 몇 개의 현대작품을 함께 덧붙이고 싶다. 그저 르네상스와 인상주의 미술 정도가 다인 줄 알았던 내가, 이제는 현대미술의 모호함까지도 품을 수 있는 그릇 넓은 감상자가 되었다.


첫 번째 작품,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림이 현실을 재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감정과 주관적 체험을 드러내기 시작한 20세기 초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진히 여운을 남긴 내 추억이 떠올랐다. 서로의 사랑이 너무나 달콤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여자의 표정과 꽃밭 위를 감싸는 황금빛 망토는 그 황홀함을 더 찬란하게 만든다. 폭 안겨있는 여자를 보면 그녀는 느끼는 남자를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게 여겼을거다. 그런데 시선을 오른쪽 발목으로 향하면 보이는 여자 발목의 금 빛줄이 은근히 속박을 나타낸다. 그리고선 다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표정엔 온전히 황홀만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어딘가 갇힌 듯, 스스로가 아닌 듯한 기묘한 감정이 배어 있다.

그리고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어 그렇지, 다리를 펴면 남자보다 더 큰 키일 수 있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났다 ㅋㅋ. 사랑의 달콤함과 약간의 억압이 교차하는 그림이라 더욱이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랑은 원래 속박을 품고 있을까? 사랑하니까 참을 수 있을까? 참는게 사랑이 맞을까? 모르겠다~ 어려워~~

작품은 이렇게 각자의 찬란했던 순간들을 불러낸다. 그 미묘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 예술의 힘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작품,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실제 존재하는 사물의 익숙함을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조합하는, 일명 엉뚱한 결합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다. 초현실주의를 떠올리면 대개 살바도르 달리와 마그리트가 번뜩 떠오른다.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을 낯선 맥락 속에 배치하는, 이른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는 감정과 일정 거리를 두고, 차갑고 비논리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생각했는데, 마그리트의 이 작품은 묘하게 따뜻하고 위로가 되어 가져와봤다. 어두운 밤 거리 풍경에 밝고 맑은 낮의 하늘을 대조한, 분명히 이질적인 풍경인데도 정적이고 평온한 분위기가 스며 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끄럽고 소란한 그림은 이제 못 보겠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더욱이 더..



세 번째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의 명성과 실력은 대부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사람을 묘사한 것인지, 캐릭터를 그린 것인지 모호한 형태 속에서 현대미술의 난해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지만, 게르니카는 난해함조차 감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스페인 출신 피카소는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 고향의 한 도시인 게르니카가 폭격으로 파괴된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자 이 작품을 신문 기고용으로 그렸다. 화면의 우측부터 시선을 옮기면 불타는 건물을 보며 절규하는 인물, 신체 일부가 드러난 줄도 모른 채 도망치는 사람, 울부짖는 말과 소, 그리고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구도로 죽은 아이를 붙들고 절규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한 화면 속에 전쟁이 남긴 공포, 상실, 파괴, 절규가 압축되어 있다.


특히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큐비즘 형식을 통해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폭력의 실체를 시각적 증언으로 남겼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피카소가 자신이 뱉은 말대로 살아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이미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데 삶의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재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게르니카 뿐 아니라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 등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려는 작품들을 남겼다. 피카소는 자신이 한 말을 작품으로 실행한 셈이다.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쓰니까 도슨트 전시 보러 가고 싶어졌다!

재밌는게 뭐가 있나 찾아봐야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Career] 합리적 낙관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