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불안은 내 삶에 존재해왔다.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만은, 나는 유독 불안한 사람이다. 아니 그 보다는 보이는 것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불안한 사람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부정은 나쁘고 긍정은 좋은 것이라는 지독히도 단선적인 시각 속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다보니, 긍정은 내 성격처럼 내재화되었고, 사람들은 좀처럼 내 안에 불안이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다. 그 인식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다.
나는 불안을 이야기하는 법을 좀처럼 모른다. 이상하게 다른 어떤 감정보다 불안을 나누는 일은 유독 어렵다. 내가 누군가에게 불안을 직접 내비친다면, 그 사람은 내게 ‘안전지대’라는 뜻이다. 다른 의미로는 신뢰인데, 함께 보낸 기간이 길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매 평생 함께해온 이 불안은 내 인생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되었지만, 명확한 목표와 목적없는 불안은 낙폭이 큰 동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또 다른 불안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쩌면, 불안을 앞으로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일지도…
왜 사람은 불안할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불안한 이유를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라 나열한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불안의 원인이 다르겠지만 공통된 속성은 이상과 현실이 맞물리지 않는 지점에 있는 듯하다. 원하는 만큼 부유하지 않고, 원하는 만큼 성취하지 않았으며, 그게 무엇이든 원하는 만큼 도달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 불안인 거 같다.
사랑결핍은 자신감 부족을 만들고, 속물근성은 외적 가치만을 좇게 만들며, 지나치게 높은 기대는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능력주의는 끝없는 성과 압박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키운다. 여기에 한 스푼 더 얹자면, 나처럼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조급함이 불안함을 키우는 촉발제가 된다.
사실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너무나 정직해서인지 와닿지 않아, 나만의 해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 많은 연구들이 말해주듯, 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문제를 정확히 아는 일'이다. 그 연장선에서 나는 내가 가진 불안이 무엇인지 정의해보려고 한다. 피하지 않고 마주 치는 것만으로 나는 불안의 늪에서 한 발짝 빠져 나왔다!
잘해야 한다는 불안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곳에 있든. 스스로가 인정할 만큼 잘해내는 것도 중요하고 타인이 인정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남들이 인정하고 결과가 좋아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면 그 성과는 결과론적 허상이 되어 또 다른 불안을 낳는다. 반대로, 나 스스로는 인정할 만큼 열심히 했는데 다수가 알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에서 말했듯, 인간에게 무시만큼 잔인한 고문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유독 엄격하다. 목표 완수 후 자축은 사치처럼 느껴지고, 곧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다시 달려간다. 어떤 지점에서 내 인생은 퀘스트를 연달아 수행하는 경주마 같다. 하나를 끝내면 곧바로 다음, 다음이 끝나면 또 그다음. 성취가 멈추는 순간, 나는 이유 없이 불안해진다. 마치 태생부터 일에 최적화된 존재인 것처럼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이만큼 애써왔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인정이 따르지 않을 때면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불안이 파생된다. 지속성은 외부의 평가보다 더 내재적인 동기 위에 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은 유해해질 필요가 있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보상을 허락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조수석에 탄 사람이 운전자보다 멀미를 많이 하는 이유는 단순히 위나 귀 문제라기보다, 통제감 상실에서 오는 불안 반응으로 설명된다. 멀미는 뇌가 상황을 예측하거나 통제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불안 기반의 생리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불확실한 상황을 굉장히 불안해 한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멈춰 섰을 때 항공과 여행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지만, 동시에 배달과 이커머스, 화상회의와 원격근무는 일상이 되었고 줌과 넷플릭스, 쿠팡 같은 서비스는 단기간에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화와 문자에 머물 것 같던 기기는 카메라와 SNS를 낳았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라는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냈다.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비효율로 여겨지던 재택근무는 오히려 생산성과 삶의 방식을 재정의했고, AI의 등장은 일부 직업을 위협하는 동시에 전혀 새로운 일의 형태와 규모(특히 솔로프리너)를 탄생시켰다. 우리는 언제나 계획하며 살아가지만, 뜻밖의 사건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동시에 누군가에겐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러니 예측 불허한 미래를 예측하려 드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 글을 쓴 후에 무엇을 할지, 내일 아침 출근길에 어떤 옷을 입을지까지 계획하며 하루를 보낸다. 물론 계획이 가능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세우고, 그 경계를 넘는 일들에 대해서는 불안을 켜고 끄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나는 완벽한 예측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통제 속에서 비로소 안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어디 성취만 그런가. 사랑도 다르지 않다.
바라는 사람만을 찾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는 이유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재단한 미래의 형태대로 상대가 나를 따라와주길 바라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나 역시 이 이기적인 늪에 빠지려 할 때면 의식적으로 상대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을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우리는 사랑 그 자체를 하기보다, 대상을 (사랑해도 괜찮을 것 같은 조건과 미래) 먼저 사랑하는 역설 속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올지 모르는 이상형과 이상향을 위해 기대하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불안을 완전히 0으로 만든다는 건, 어쩌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그렇다. 나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불안해도 회피하지 않고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옳은 답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불안에 떨며 보냈던 시간들을 나는 한 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옳고 좋은 사람들을 찾아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내 삶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왔다. 그래서 사랑 역시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아끼고 또 아끼다, 옳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안전지대를 만나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마음을 내어주고 싶다. 누군가의 말처럼, 흙탕물에서 흙을 잘 발라내려면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