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성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를 사랑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사랑할 수 없다. 달리 외사랑, 짝사랑이 인류의 영원한 레퍼토리가 아니다. 사랑의 불가사의한 이 잔혹성은 여전히 나에게 생경스럽다. 그리고 솔직히 고하건대, 무진장 어렵다. 사랑은 상호호혜적이지만 정작 상호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니 이토록 모순적인 감정이 또 있던가. 사랑은 논리도 공평도 아닌, 각자의 속도와 방향을 가진 벡터 같아서, 같은 순간에 같은 각도로 마주보기가 기적에 가깝다.
역시나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월터와 키티 부부가 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그들의 벡터는 정반대였다. 키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닌 도망으로 결혼을 시작했고, 결국 바람이라는 멍청고도 멍청한 과오를 저지른다. 더 개탄스러운 건 그 이후다. 자신의 과오를 매력 없는 월터의 탓으로 돌릴 때,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디까지 비겁해질 수 있는가를 볼 수있다. 바닥까지 추락하는 비논리적인 방어기제를 보며, 사랑의 잔혹함과 함께 어리석은 인간의 본성이 더 개탄스러웠다.
서머싯 몸은 이 위선적이고도 속물적인 인간의 양태를 낱낱이 드러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어리석음조차 껴안을 때 비로소 희망이 시작됨을 시사한다. 하지만 삶은 결코 한 번의 깨달음으로 정갈해지지 않는다. 키티는 끝내 월터에게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냈고, 익숙한 터전으로 돌아와서는 또다시 찰스와 욕정에 휘둘린다. 이성적으로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본능 앞에서 키티는 혼란이 빠진다. 결국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애정을 확인하며, 자기 자신을 오롯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진정 지독한 반복과 혼란이야말로 인간이 성장통을 겪는 과정이란 말인가..
나는 수많은 자아 개념 중 자기 수용이란 말을 가장 좋아한다.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고 모자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 인정하는 용기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비겁하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직시하고 더 나아질 용기를 내는 것.
어리석고 뻔뻔한 키티가 안쓰러울 만큼 불쌍했고, 혹독하리만치 잔인한 월터는 서늘했으며, 그냥 혐오스러운 찰스는 끝내 싫었다. 주인공 모두에게 부정적인 잔상이 남은 책이지만 고전 소설 답게 인간의 내적 성장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직설적으로 잘 표현된 책이다. 고전 소설은 이런 맛이지. 소설을 미루어 내 삶을 사유하게 하고, 주인공을 지렛대 삼아 나를 성찰하게 한다. 오랜만에 다시 집어든 고전 소설 대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