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근면성실하지 않거나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속으로 은근히 멸시했다.
아니다. 친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거리를 두었으니 겉으로 표현한 것도 맞다.
거리에서 폐지 줍는 노인을 볼 때면 젊어서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속단했다.
저 사람은,
나처럼 독서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공부하지 않았으리라.
나처럼 불합격 비보에 눈물 흘리면서도 이를 꽉 물지 않았으리라.
나처럼 새벽 3시에 퇴근하고 아침 9시에 출근할 만큼 열심히 일 하지 않았으리라.
나처럼 퇴근 후 미래를 위한 새로운 준비를 하는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노년에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에너지 가격을 비롯한 모든 물가가 올랐고, with 코로나 이후 미국금리가 무섭도록 가파르게 올랐다.
대한민국 부동산은 높아만 가는 금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경기는 얼어붙고 가격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어디가 바닥인지 가늠이 안될 만큼 가격이 줄줄 흘러내렸다.
예전에도 이 정도 금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렇게 가파르게 한꺼번에 오르는 금리에 사람들의 심리는 꽁꽁 얼어붙었고 이는 곧 공포가 되었다. 금리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세입자 전세 만기가 돌아왔고 '매매가' 못지않게 '전세가'도 하염없이 떨어져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더라도 수억을 마련해야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초의 계획은 이 아파트를 팔아서 생기는 차익으로 새로 입주할 아파트 잔금에 보탤 생각이었으나, 내가 산 가격보다 더 낮은 가격에도 살 사람이 없었다. 매매도 전세도 거래는 씨가 말랐고 전세 만기는 바짝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입맛이 사라졌다. 걱정에 잠도 설쳤다.
하지만 세입자의 전세금에 손해를 끼칠 수는 없었으므로 매수가에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아파트를 싸게 처분하고 고금리의 돈을 마련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절망을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돈이 단합을 한 듯 미친 듯이 빠져나갔다. 우리는 억대의 손해를 보았고 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저질러 놓은 일을 이렇게 밖에 수습 못하는 내가 한심했고 남편에게 몹시 미안했다.
점점 일상의 간단한 물음에도 신경은 날카로웠고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차고 목소리는 앙칼져 갔다.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기에 남편과 나는 서로 말을 아꼈다. 우리는 결혼 이후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입주한 지 한 달 만에 뽀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새로운 변수였다.
돈은 내 재산을 갉아먹더라도 해결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생명은 내가 관여할 여지가 없는 하늘의 영역이었으므로 나의 하찮음과 보잘것없음에 절망하며 눈물 흘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일 동안 못 먹고 못 자면서 내린 결론은 전재산을 다 날리더라도 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새로운 병원을 알아보고 수술이 성공하기만을 바라며 기도하는 나약함 뿐이었다.
이쯤 되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운명이란 놈은 나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 눈을 멀게 하여 길고 기나긴 터널에 가뒀다. 아득했다. 좌절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누가 나를 좀 살려주었으면 좋겠건만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하루종일 눈에 눈물이 그렁한 체로 하늘의 결정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열심히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삶은 내가 설계한 대로 이뤄질 줄 알았는데 인생은 변수를 만나면서 나의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어리석게도 전쟁과 금리 폭등, 생명이라는 변수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건방지고 오만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나의 인생을 한 뼘이라도 개선해 보고자 불사른 나의 청춘은 어쩌란 말인가?
앞으로도 '열심히'란 것을 해야한단 말인가?
요즘 나의 영혼은,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무기력하고 공허하여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운전하다 신호를 받고 차를 세웠다.
70대의 남자가 작업복을 입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다.
저 사람은,
한 가정의 소중한 가장이고 존경받는 아버지일 것이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하여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