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얼굴을 빤히 보면 겁난다

오들오들

by 김몽콕

지난 10년간 엄마와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였다. 타향살이를 정리하며 집으로 돌아온 후, 하루 24시간 엄마와 붙어있게 된 건 아니지만, 이전보다 얼굴을 비칠 시간이 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밤, 거실에서 TV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웃긴 장면에서 엄마와 마주 보고 와하하 웃다가 엄마가 웃음이 싹 가신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눈꺼풀 처졌다. 어떻게 좀 해봐라.”


오밤중에 졸음으로 감긴 눈꺼풀을 똑바로 뜨란 말을 저렇게 비장하게 할 일인가,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눈을 그렇게 뜨지 말라고.”


그제야 엄마가 졸린 눈을 뜨라는 게 아니라 눈꺼풀 형태를 지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눈꺼풀이 처져있는 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으니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성형외과 의사가 본다면 쌍꺼풀 수술이나 눈썹 거상술을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중요한 사실은 눈꺼풀이 연극무대 커튼처럼 내려앉아 앞이 안 보인다던가 속눈썹이 눈알을 찔러서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병 걸린 것도 아닌데 뭘 어떻게 하라고.”


“눈꺼풀이 축 처져서 의학적 조치를 받으라는 건데 왜 화를 내지?”


나는 좀 불퉁하게 대꾸했을 뿐인데, 엄마는 왈칵 성을 냈다.


‘사실 니 눈은 큰데.’ 엄마가 간혹 쌍꺼풀 수술을 받으면 어떻겠냐고 한 적이 있긴 했다. ‘이제 나이 드니까 눈꺼풀에 슬슬 주름이 잡힌다. 여기서 수술받으면 삼꺼풀된다.’라고 하거나 ‘우리 회사 이 박사 눈썹 거상하고 모바일 뱅킹도 못하고 입국심사도 힘들어졌다더라.’라고 넘겼던 일에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상황을 곱씹을수록 질병을 미련 쓰고 방치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아 씨, 난 홑꺼풀로 태어나서 홑꺼풀로 살고 있는 것뿐인데요. 곧 잘 시간이라 화는 못 내고 말없이 TV 보다가 방에 들어갔다.


몇 년 새 엄마가 ‘딸의 행복을 위해’ 딸의 신체를 통제하는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딸이 살찔까 봐 밥공기를 빼앗는 엄마, 야근 후 녹초가 된 딸을 헬스장으로 떠미는 엄마, ‘우리 애는 엉덩이가 너무 커서 그런 옷은 못 입어요.’ 옷가게에서 바디 셰이밍 하는 엄마들의 사례를 듣고 딸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며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엄마가 바디 셰이밍 하는 엄마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건 우리 모녀가 체중 감량과 동떨어져 있는 체질을 가진 탓이었다. 몇 년간 엄마로부터 외모평가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드물었던 이유는, 떨어져 사는 탓에 엄마가 내 얼굴을 분석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모 신체 강박으로부터 깨어있는 우리 엄마’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정순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정순의 연예인 외모 품평으로 진저리를 친다. 그 개그우먼은 눈에 흰자가 너무 많이 보이더라, 사고 터지기 전부터 인상이 쎄-했다. 현업 싱어에 피부가 참 좋은 가수가 나오는데 비결이 선크림이라고 하더라, 나도 잘 때 선크림을 바르고 자면 피부가 좋아질까? 정순의 외모품평과 미용 상식이 영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엄마의 외모평가는 통계적이고 분석적이다. 저 뉴스 앵커는 항상 종아리 굵기 보다 폭이 좁은 바지를 입어서 바짓단에 줄이 좍좍 서 있어. 저 배우는 저기 이마에 보형물을 넣었네, 부채꼴로 윤곽이 보이잖아. 쟤는 어렸을 때부터 리프팅으로 하도 피부를 당겨서 웃지를 못하네.


조각조각 분석하는 매서운 눈이 내 얼굴을 향할 때, 어떤 말이 떨어질지 겁난다. 최근에는 정수리와 옆머리에 난 흰머리가 엄마 눈에 띄어 몇 가닥 잘랐다. 당분간 엄마와 떨어져 살 것 같지도 않고 속된 말로, 내 얼굴은 상할 일만 남았다. 잘라 없애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흰머리와 더 깊어질 이마와 눈가의 고랑과 종잇장처럼 얇아질 살가죽. 엄마는 결점을 낱낱이 지적해 고치려 들 것이고, 나는 슬금 눈치를 보며 이것이 최선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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