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한_502년_순장제 폐지

실직주 방어전_(1) 이야기의 시작

by 박달

502년, 신라 지증왕 3년 봄.


실직 동북 고을은 낮고 부드러운 산등성이들 사이에 움츠려 앉은 고을이었다. 고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은 아직도 겨울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고, 북쪽 고갯마루에는 눈이 채 녹지 않은 채 얼어붙은 듯했다. 하지만 평지의 밭두렁에는 이미 연둣빛 풀잎이 얼굴을 내밀었고, 진달래는 보랏빛 봉오리를 맺기 시작했다. 하늘은 종일 뿌연 구름이 걸려 있었고, 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방향을 바꾸며 뺨을 스쳤다. 새벽이면 안개가 들판을 덮었고, 해가 뜨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개울물은 겨울보다 불어나 있었지만 흐름이 이상했다. 물결이 낮고, 잔잔한 듯하면서도 방향이 뒤틀리는 지점이 많았다. 이사부는 그 물길을 바라보다가 눈을 더 먼 산등성이를 향해 치켜 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변화의 조짐을 앞서 느끼는 아이였다.


이른 새벽부터 고을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논두렁을 걸었다. 논에 물을 대러 나온 농부들이 수군거리며 말하길, 산 아래 초소 근처에서 마른 피가 묻은 깃털 몇 개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노파는 고을 아이들 손을 붙잡고 말렸다.


“오늘은 멀리 가지 마라. 이런 날씨에다, 바람이 뒤엉키면 사람 말고도 돌아다니는 게 있다.”


이사부는 급히 진영으로 돌아왔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령의 도착을 알리는 말의 울음이 들렸다. 이사부는 방금 막 도착한 전령을 맞이했다.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들어온 이는, 이사부의 명령에 따라 주변 초소를 돌아보고 온 지역 탐문꾼인 병사였다. 흙먼지로 희끗해진 어깨를 털며, 그가 숨을 고르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찌 고개 너머에서… 말 위에 탄 자 셋, 망루 너머로 확인했습니다. 말갈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방 안의 모든 기운이 얼어붙었다.

병사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눈에 띄다니… 도발만이 아니라 조만간 오겠군.”


이사부는 그 말을 들으며 지도 앞으로 걸어갔다. 목책 모형 위로 손을 뻗어, 봉우리와 개울의 교차 지점을 짚었다.


“이 고개에서 그들을 봤다면, 이동 속도로 봐서 이틀 안에 이 지역을 다 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령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반드시 이 고을을 공격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말갈은 언제나 약탈하진 않았습니다. 가축만 몰고 갈 수도 있고, 그냥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괜히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이사부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변성도 다 지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말투는 묵직했다.


“말갈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나가며 가져갑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정적이 흘렀다. 밖에서는 찬 바람이 지나가며 창문을 울렸고, 까마귀 한 마리가 멀리서 울음을 토했다.

그때였다. 막사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늦었나 보군.”


굵은 목소리와 함께 문을 밀고 들어온 이는 실직 병영의 야전 지휘관, 나마1 아간이었다. 그는 다 들은 얼굴이었다. 전령이 말할 때부터 문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사부 화랑2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붓을 들어 지도 위를 빠르게 그었다. 두 줄. 곧게 뻗은 동선 하나, 그리고 마을 뒤편의 소로로 연결되는 우회 동선 하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중심 마을로 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불을 놓습니다. 그들이 피운 불과 연기가 퍼지면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고, 민가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를 막으려면, 불보다 먼저 주민을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방어선은 화점에서 반경 삼백 보. 거기서 막아야 불길이 마을을 삼키지 않겠지요.”


이사부는 더욱 더 자세한 전략을 설명했다. 나마 아간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쉽지 않겠으나, 그리만 된다면... 그리 해보십시다.”


나마 아간의 말에 이사부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간은 병사들에게 명했다.


“사람을 먼저 옮기고, 병사는 두 갈래로 나누어 준비하라. 내가 적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


그렇게 해서, 그날 실직 마을엔 전운이 감돌았다. 해는 저물고 있었고, 붉은 노을이 동산 너머로 길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마을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닭도 울지 않았다.



1. 나마: 신라 17관등 중 11번째 관등

2. 화랑: 귀족 자제 중에서 전국을 다니며 학문 수양을 하는 자들을 화랑이라고 부르고 있었음. 이후 이러한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정착시킨 것이 진흥왕 시기의 화랑제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