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주 방어전_(2) 말갈의 움직임
어스름이 골짜기마다 드리우기 시작한 저녁 무렵, 동북 실직 지역의 야전 병영은 불빛이 훤했다. 천막을 두른 장막 마루 위에는 나무 탁자와 지도판, 갈필 붓 몇 자루, 그리고 붉게 달궈진 화로가 놓여 있었다. 한낮의 강풍은 가라앉았으나, 동쪽 숲의 끝자락에선 여전히 바람이 나뭇가지를 긁고, 밤짐승들의 울음이 멀리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장막 안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장막은 굵은 기둥도 없는 허름한 것이었지만, 천장에는 매년 적의 움직임을 기록한 가죽지도가 걸려 있었고, 구석엔 각종 병장기와 궤짝에 든 목간 문서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이곳은 전쟁을 논의하는 자들의 언어가 잠잠한 기운처럼 스며드는 곳이었다.
그 한복판에 나마 아간이 있었다. 마흔을 조금 넘은 정도였으나, 이미 그의 수염은 눈서리가 얹힌 듯 희끗했다. 그의 눈빛은 되려 어린 장수처럼 날카롭고 예민했다. 오른손으로는 마른 먹을 다시 찍어 지도 위 산줄기를 짚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검은 부싯돌을 굴리며 궁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사부가 서 있었고, 아직 제대로 털지 못한 먼지와 풀잎이 어린 장수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군막 안은 등잔의 기름 냄새와 함께 초여름 흙냄새가 그들의 열기와 함께 뒤섞여있었다.
"지금 화랑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고개 너머 말갈들이 단순히 지나가기 위해 고을 주변을 살피는 족속들이 아닐 겁니다. 그들의 목표는 곧 이 고을이겠지요."
아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는 십수 년을 병마에 몸담아온 노장답게 말 한 마디에 판단을 실었다.
“그들은 빠릅니다. 낮에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이곳을 정찰한 이상, 사흘 안으로 기습이 시작될 것이고. 예상치 못한 시간대의 기습일겝니다. 마을 북쪽의 수림과 우회 가능한 계곡길 아래 방향… 실직으로 타고 내려오는 길이 있는데 어디로 올까요?”
아간은 이사부를 보며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젊은 화랑 아니 어린 화랑, 이사부. 아직은 상투도 반쯤만 틀었고, 눈빛은 여전히 격정 속에서 방황 중인 사슴 같았다. 그러나 그 눈 속에선 질문과 판단이 쉼 없이 교차하고 있었고, 아간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전하의 명은 단호하셨습니다. 실직을 넘기지 말고, 주민의 피해를 하나도 없이 막아내라는 것이지요.”
이사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엔 왕명을 실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짙게 묻어 있었다.
“그래서 화랑을 부른 것입니다.”
아간은 붓을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이어 이사부가 말을 받았다.
“여기, 이쪽의 고지 너머에 이중으로 숲이 겹치는 구간. 여기를 통과하여 들이 닥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번 이 방향으로 예행 연습하듯 쳐들어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리하리라 봅니다.”
“만일... 그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침입한다면 어쩌지요? 그들이 언제 올 지 예측이 되나요?”
아간은 정적 속에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
“기습을 당할 경우에도 민가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죠?”
이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북쪽 우회로는 짐승의 흔적이 적고, 말발굽이 남기 쉬운 지형입니다. 그쪽으로 매복을 두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역으로 우리가 역습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시간을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에 이사부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아간은 막사를 지키던 병사 둘을 불렀다.
"내일부터 밤까지, 초병을 세 겹으로 강화하라. 마을 경계선을 따라 망 보초를 재배치하고, 이틀 안에 주민들을 내성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해라."
“그럼, 마을 외곽은 버립니까?” 젊은 병사 하나가 물었다.
아간은 고개를 저었다.
“버리는 게 아니다. 목책은 지켜야 한다. 불이 번지는 걸 막는 게 우선이다. 불이 번지면 사람도, 병력도 퇴로가 끊긴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이사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화랑, 주민 이송을 맡아주시오. 말갈은 불과 혼란을 이용합니다. 화랑께서 말하신 것 그대로 하십니다. 사람을 지키십시다.”
이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이 오는 시간을 예측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민 이송을 아라라는 소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마을 아이들과 노인들이 그 아이를 잘 따릅니다. 주민 정리와 이동을 맡기기엔 적임자입니다.”
“아라?” 아간은 잠시 갸우뚱했다. 그리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음, 그 소녀는 시장 좌판에서 무청을 팔던 그 아이 아닙니까?”
“그 아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을의 지리를 정확히 알고 있고, 사람들과의 정서적 유대도 큽니다. 또, 그녀의 감각은 일반인 이상입니다. 그 직감이 여러 번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아간은 나직히 웃었다.
“좋습니다. 화랑께서 그 아이를 믿으신다면, 맡겨 보겠습니다. 수하들에게 명령해두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해주십시오. 민심이 두려움에 젖기 시작하면, 병사보다 먼저 무너집니다.”
그 말에 이사부도 끄덕였다.
“맞습니다.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병법이라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었습니다.”
그 순간, 천막 입구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성문 밖 문지기 병사가 급히 뛰어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화랑께서 명하신대로 소녀가 나타나선 전달하라는 것이 있어 급히 전하러 왔습니다. 기러기 떼가 비정상적으로 마로메 북동쪽 하늘을 가로질렀다고 고해달라고 합니다. 아라라는 소녀가 화랑께 급히 전언을 남겼습니다.”
아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라 그 소녀... 아니, 계책이 아니라 직감이라는 건가.”
이사부는 입가에 약간 힘을 주었다.
“아라는 단순한 직감이 아닙니다. 숲과 산, 새와 짐승의 반응을 그 누구보다 정밀히 짚어냅니다. 그래서 미리 그녀에게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말을 믿습니다. 아라의 전언을 통해 그들이 오는 시간과 방향이 좀 더 확실히 보입니다.”
아간은 이사부를 다시 바라보았다. 농담기 없이 진지했다.
“화랑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나도 믿겠습니다.”
말없이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전장 밖에서 생명을 먼저 말하는 장수, 전장 안에서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장군. 그리고 둘 사이엔 검이 아닌, 믿음의 선이 그어졌다.
그날 밤, 병영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숲속을 감시하던 기러기 떼는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말갈의 검은 그림자가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