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여행기
낯선 이로 찾아 왔다가 낯선 이로 다시 떠나네.
오월은 많은 꽃다발로 나를 반겨주었지.
소녀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그 어머니는 결혼까지 얘기했는데,
지금은 온 세상이 우울하고 길은 눈에 덮여 있네.
길 떠나야할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네.
나 스스로 이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찾아야 하네.
그림자만 홀로 나의 친구가 되어 따르고,
눈 덮인 들판 위에서 나는 짐승의 발자국을 찾네.
- 슈베르트 작곡 빌헬름 뮐러의 시, ‘겨울여행’ 중에서
K항공으로 인천 공항을 출발할 때부터 불안한 마음을 한 가득 안고 있었다 나의 여정은 인천을 출발하여 암스테르담을 경유하여 오슬로에 도착한 후 올레순으로, 중간에 스탑오버 없이 쭉 연결되어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예약은 인천에서 오슬로와, 오슬로에서 올레순을 따로 분리해서 하였으므로 인천에서 최종 목적지인 올레순까지 짐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즉 오슬로에서 짐을 찾아서 입국수속을 끝낸 후에 다시 오슬로에서 올레순 가는 비행기에 체크인 수속을 해야 했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찜찜하게 출발이 되었다. 인천 공항에서 체크인할 때, 카운터 직원에게 짐을 올레순까지 붙여 줄 수 있느냐고 문의하면서 노르웨이 국내선 비행기표를 제시하였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였고, 그러면 오슬로에서 짐이라도 일찍 찾을 수 있도록 내 위탁 수하물에 택(door side tag)을 붙여 달라는 나의 애원도 무참히 거부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비행기 타고 가는 내내 불안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세간의 말은 보기 좋게 들어 맞았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니 보안 검색하는 곳에 줄이 어마어마하다. 눈 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대기하는 승객의 줄에 선 사람들 숫자는 어림잡아 천 명은 되는 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도무지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직원들이 체크 하는 라인을 줄이고 있다. 자기들도 쉬어야 한단다. 나에게 갈아 타는 데 주어진 시간은 2시간 20분 여, 똥 줄이 탄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난국이다.자칫하면 국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앞에 서서 기다리는 서양인에게 급하다고 양해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자기도 바쁘단다. 그렇게 하여 보안수속에만 거의 2시간을 허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 입국 수속이 기다리고 있다. 한참이나 저 멀리 뒤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비행기 출발시간은 고작 20분 남았다. 눈치 보고 체면 차릴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정신없이 직원에게 뛰어가서 사정을 했다.긴박함이 통했던가, 내 탑승권을 본 직원이 저기로 가라고 손가락을 가리킨다. 기다리는 사람이 서 너명 밖에 없는 줄이었다. 그렇게 입국 수속을 하고 보니 바로 출발 시간이 다 되었다. 냅다 뛰어 달려 갔다. 통과여객들이 천천히 걸어 가는 그 길이 왜 그다지도 멀어 보였는지 모른다.뛰어도 뛰어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게이트에 도착해 보니 정작 비행기는 예정 보다 20분 지연 출발이란다. 2022년 6월 덴마크 스키폴 공항은 수속이 늦기로 악평이 높았다. 이름하여 항공대란이 벌어지던 때였던 것이다. 코로나로 감축했던 인력이 채 돌아오지 못한채 맞은 승객 폭증 현상 때문이었다.
오슬로 공항에 12시 거의 다 되어 도착한 나는 오후 1시 출발하는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는데 짐을 찾아서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여 다시 짐을 부쳐야 했다. 좌석 배정은 미리 휴대폰으로 해 두었으니, 짐만 부치면 되었다. 그런데 오슬로 공항 도착하여 보니 짐이 나오지 않는다. 지연 도착한데다가 짐이 안 나오니 애가 탔다. 직원에게 하소연해 보았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의 일인지라 사무적으로 대한다.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나의 짐이 나왔다. 나는 빛의 속도로 쏜살같이 달려서 비행기 출발 20분 전에 짐을 부칠 수 있었다. 한 늙으막한 직원이 불쌍해 보이는 나를 도와 주워서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첫 목적지인 올레순에 도착을 했다. 날씨는 흐리고 간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난감한 상황이 나타났다 . 노르웨이 크로네 돈이 한 푼도 없다. 시내로 가야 하는데 잔돈이 없다. 잔돈 없이는 버스를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택시를 타기로 하고 택시 기사에게 유로화로 안되겠느냐고 사정을 했다.그는 50유로 달라고 했다.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기분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노르웨이에서는 사실 현금이 필요가 없다. 버스 요금도 편의점 커피도 모두 신용카드로 결제를 한다. 환전하는 곳이 아예 없다. 공항에서도, 심지어 은행에서도 환전 업무는 취급하지 않는다.
첫날은 비를 맞으면서 맥주 한 잔으로 달래고 말았다 정체를 모르는 일식 집에서, 달고 맛없는 생선 한 조각을 씹었다. 해가 늦게 지는 백야의 계절인데 바깥은 어둠이 짓누르고 있었다. 비가 기분 나쁘게 옷을 적시는 부둣가에는 이름 모를 새 두 마리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집중하지는 않고 건성으로 보기는 했지만 가슴 한켠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시끄러움이었다. 마치 나의 남은 여정을 예고라도 하는 듯....
이튿날, 눈을 뜨니 오전 4시, 바깥은 환하다. 백야. 밤새 해가 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크슬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길에는 술 취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혼자만의 감각으로 새벽의 기운을 담고 또 담았다. 남는 것은 바로 사진이 아니던가. 날이 희뿜하게 열리고 보니 저 아래 동네에 가로등 불빛 하나가 바다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제 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슬픔때문일까, 아니면 간밤의 숙취때문일까, 빨간 불빛은 물에 젖이서 흐느적 울고 있었다. 슬픔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채, 아침을 먹고 폰을 열어 보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오늘 예약한 투어가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난감했다. 뭔가 단단히 꼬여 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영 계획대로 굴러 가지 않는다. 호텔 직원에게 택시를 부탁했다. 예약했던 코스로 여행을 하려면 2,500크로네를 내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30만원이 넘는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세 군데를 갔다. 아이네라고 하는 등대 마을과 교회 한 군데 그리고 야외민속 박물관이었다. 등대마을은 그냥 등대가 있는 마을이고 교회는 죽은 자의 무덤이었다. 야외 민속 박물관 지붕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무덤을 보고 풀이 자라는 옛 집을 보고 있노라니 자못 우울하다. 어디선가 슬픈 ‘솔베이지의 노래’가 들려 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돈을 벌어 오겠다고 외지에 나가서 힘들게 돈을 벌어 오기는 하였으나, 그 돈을 강도에게 빼앗기고 빈 손으로 돌아 온 남자.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몸은 이미 늙었으나 솔베이지의 사랑은 그대로 이다. 그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에 누워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 이 노래는 노르웨이 작곡가의 작품이다. 숙소의 외로운 방에서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궁상맞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셋째 날, 원래는 아침 7시에 안달스네스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그런데 안달스네스에서 트롤스티젠가는 투어가 취소되어서 - 예고없이 또 취소되었다 - 12시 버스를 타기로 변경하였다. 모처럼 날씨가 무척 좋은 날이다. 기분이 많이 즐거워졌다 그 동안 우울했던 것은 날씨 탓이었던가. 오늘따라 크루즈 선이 들어 왔는지 거리가 활기가 넘친다. 관광 버스도 다닌다. 관광버스 타고 전망대에 다시 갔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크리스티안순으로 갔다. 버스 에서 내려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다. 크리스티안순은 작은 소읍 정도되는 마을이다.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단 한가지, 아틀란틱 로드를 보기 위해서이다. 다음 날 렌터카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예약한 8시에 도착해 보니 렌터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전화를 하니 그제서야 출근을 한다고 한다 오늘은 공휴일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제 멋대로이다. 고객은 하느님, 이런 말은 여기 사전에는 없다. 그러나 기분은 좋다. 아틀란틱 로드를 직접 만나다니 말이다. 날씨도 좋다. 그런데 직접 달려보니 길이가 에상했던 것 보다 짧다. 그리고 별로 볼 것이 없다. 다른 곳에 잘못 왔나하고 몇 번을 지나갔다 왔다 했다.그런데 드론으로 보니 제대로 멋이 나타 났다. 역시 사진빨이라니까. 여행사나 관광지 홍보에 나오는 사진은 사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찍은 것에 불과하다. 그 사진 보고 갔다가는 실망을 하고 말 것이다. 그냥 그 곳에 가는 여정 자체를 즐기면 될 일이다. 여정 자체가 최종 목적이고 최종 성과일 것이다. 내친 김에 나는 차를 몰고 보드라는 작은 어촌 마을까지 갔다. 뭐 별로 볼것은 없지만 도로 바깥에 펼쳐지는 풍경이 압권이었다. 이 도로는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멀리 설산을 배경으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곳, 길가에는 양떼들이 이리 저리 무리를 지어서 다니고 있는 곳이다.
크리스티안순에서 트론하임으로 가는 교통편은 극히 선택지가 엺다. 새벽 5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고 그 다음이 선박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선박 예약을 위하여, 떠나기전부터 여러 날을 고민했다. 선표는 예매가 되지 않는 것이다.그런 탓에 크리스티안순에 도착한 날부터 배타는 곳과 표를 사는 곳을 찾아 다녔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터미널을 다행히 찾았으나 어디서 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고민을 많이 했다. 조그만 모니터가 있는데 시간이 나와 있고 그 옆에 타는 곳 표시가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1에서 10까지 있다. 글자는 모두 노르웨이로 쓰여 있었다. 부두를 돌아 다니며 어디가 1이고 어디가 10인지 확인하였으나 전혀 알 수가 없다. 표시가 없는 것이다. 내일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으려나.
고민을 많이 하여 잇몸이 부어 오른다 (이후 10일 동안 잇몸병으로 음식 먹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출발 시간보다 세 시간 일찍 선착장 터미널로 갔다. 잔뜩 긴장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려 했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나타나길래 택시 기사에게 어디서 배를 타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부리나케 달려 갔다. 보트 한 대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물어 보니 여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 조금 전에 내가 택시 기사를 만났던 그 곳으로 큰 배 한 척이 들어 오고 있었다. 저거다. 나는 직감 했다. 뛰자. 그래서 배를 탈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선착장 터미널 안을 다시 살펴 보았다. 타는 곳이 쓰여 있는 숫자는 무엇인가. 자세히 모니터를 보니 그 숫자는 버스 승강장 번호였다. 부두 부근에 버스 종점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번호에 속았다. 그 번호에 너무 집착을 했던 것이다. 무슨 번호인지는 알아 보려고 하지 않은채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기지는 늘 미지로부터 비롯된다’고 심리학자 조던 B 피터슨은 썼다. 경험해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미지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두려우면서 설레는 법이다.
트론하임 가는 뱃길은 아주 아름다웠다
시내 도보투어를 신청했더니 가이드가 나왔는데 손님은 나 혼자였다. 이번 여행에서 신청한 현지 투어 가운데 유일하게 취소되지 않은 투어였다. 가이드는 프랑스 출신의 아가씨였는데 말이 많았다. 일이라서 그렇겠지만 나는 많은 말보다 좀 조용히 감상할 수 있도록 뇌두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쉴새없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추임새를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아 예” 또는 “그것 참” . 트론하임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우수한 대학이 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요새도 있다. 트론하임에 크리스티안 요새라니… 오늘 도보 투어 중 나는 바크렌델(Bakklendet) 과 올드 브릿지(Old Bridge)가 볼만했다. 그리고 니다로스 성당이 빠질 수는 없지.
다음 날, 트론하임에서 다음 여행지 보도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했다.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얻게 되는 작은 비행기였다. 보도 공항에 내리자 마자 렌터카를 빌렸다. 살스트라우멘(Saltstraumen)에 가려는 것이다. 살스트라우멘은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물결이다. 우리나라 명량해전에 나오는 명량 같은 곳이다. 나는 살스트라우멘 다리에 서서 몇 시간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고 매우 춥다. 물 때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밀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이 밀물인가 보다. 마침 배가 한 척 지나가니 풍광이 죽여준다. 다음 날 갔을 때는 물때가 아니었다. 어제 오기를 잘했던 것이다. 대신 오늘은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바다는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물처럼 꿈질거리고 있었다. 용솟음 치디가 저만큼 사라졌다가 다시 움찔하면서 솟아 오른다. 마치 두 명의 거인 장사가 마주 보고 싸움을 격렬하게 하다가 상처를 입고 두 거인 모두 사라지는 듯한 형상이다. 나는 이때 배가 한척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작은 배 한 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만하면 이번 여행에서 본전은 뽑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리 위에서 좀 더 가까이 오라고 소리를 질러 본다. 들리는지 점점 가까이 와 주는 보트. 고맙다. 덕분에 한 장 건졌으니…나는 흐믓한 마음으로 물가 언덕에 앉아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살스트라우멘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가 나로서는 애착이 많이 가는 곳이다. 날씨마저 따뜻하여 웃옷을 벗어도 좋고 그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거닐어 보았다. 게다가 조그만 길은 걷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간 나만의 단독 여행이 끝났다. 이제부터 일주일간은 단체 여행이 시작된다. 단체에 합류하기 위해 드디어 로포텐에 상륙을 하였다. 지금부터는 가이드가 하라는데로 하면 된다. 영국의 한 회사가 주관하는 사진 투어 프로그램이다. 단체라고 해봐야 나를 포함하여 모두 4명의 오붓한 구성이었다. 가이드겸 인스트락터인 엔디 아저씨와 두 명의 여성인데, 한 명은 클레어 할머니이고 나머지 한 명은 채식주의자 에마 아주머니였다. 클레어 할머니는 분위기 메이커이고 아주 따스한 분이였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 거창한 인사 대신에 오늘 남은 시간에 “뭐할래” 부터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어디서 왔고 직업이 무엇인지 가족이 몇 명인지 모른다. 자기소개 시간이 없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존재인데 만나는 사람마다 신분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면 재미가 있다. 그런 사이로 지내는 것도 좋다. 왜냐하면 그냥 편하니까. 엔디가 운전하는 4인승 차량에 타고 로포텐 바닷가 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편했다.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밀폐된 장소에 같이 있다 보면 침묵이 흐를 때 서먹서먹하고 어색하기 마련인데 이 곳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를 빼고 세 명은 모두 영국 사람인지라 자기들끼리 빠른 영국 영어로 떠들어 댈 때면, 나는 그저 차창 밖만 응시하고 있게 된다. 그러면 클레어 할머니는 자기들 이야기 속으로 나를 살며시 끌어 들이곤 했다. 내 이름이 그들에게는 ‘신’으로 불렸다. 천상의 신 아니면 신발의 신은 아닐 것이다.
“신, 내 사진 좀 봐”
“응 멋진데, 어디서 찍었어?”
그녀는 한참이나 자랑을 해 대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차 안에는 두 개의 기류가 형성되었다. 나와 클레어 할머니의 노인 클럽과 엔디와 에마의 중년 클럽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여럿이 모이면 분파가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보다. 7일간 같이 다니면서 수 많은 단어들을 나누었는데 하나 하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어색하지 않고 혼자 가만히 있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내가 잇몸이 부어 있어서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자 그들은 연한 대구 생선 요리를 시켜 주었다. 사르르 녹는 맛이었다.
로포텐 제도에서 제법 큰 도시인 스몰베르에서 립(RIB) 보트를 탔다. 바다 독수리(Sea Eagle) 를 보려는 것이다. 6월 중순, 한국에서는 여름 날씨이겠지만 여기는 춥다. 더구나 바다라서 두꺼운 겨울 옷을 겹겹히 입고 나섰다. 몸이 불편한 클레어는 옷을 입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도와주자 그녀는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묘하게 친해 지고 있었다. 바다 독수리는 보통 산 위에서 바다를 응시하며 앉아 있다. 그런데 보트를 운전하는 사람이 물고기 한마리를 바다에 던지자 쏜살같이 날아와 고기를 덮친다. 그 먼 곳에서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챌 수 있는지 그 시력이 신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나는 준비 부족으로 매번 중요한 순간을 촬영하지 못했다 카메라에서 찍은 사진을 저장하는 메모리 카드를 용량이 작은 것을 쓰다 보니, 연속으로 몇십장을 한꺼번에 촬영하노라면 저장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늘 그렇다. 실수를 하고 나서야 그 실수를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오늘도 또 하나 배우고 간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까지 배우기만 할 것인가.
스몰베르를 떠나 스몰베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헤닝스베어로 갔다. 로포텐 날씨는 아침이면 흐리다가 오후되면 화창하게 변한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는 늘 그랬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이서 세미나를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동네 탐험에 나섰다. 나무와 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사람과 차가 다니고 산 허리에는 구름이 쉬어간다. ‘이런 곳도 있군요’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행은 낯설음과의 만남이고 그 낯설음이 감탄을 부른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우연의 집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한참 동안 상념에 빠져 보았다.
로포텐에서 만날 수 있는 새들은 바다독수리, 논병아리(Great Northern Diver), 유럽바다비둘기(Black Guillemot), 그리고 검은머리물떼새(Oystercatcher) 이다. 우리가 만난 호수에는 논병아리 두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클레어는 검은머리물떼새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굴(oyster)을 집중적으로 잡아 먹고 산다고 한다. 그 새는 예쁘장하게 생겼으면서 온종일 시끄럽게 울어댄다. 아니 웃고 떠들어댄다. 생각을 되돌려 보니 올레순에서 만났던 그 새가 바로 이 검은머리물떼새가 아니었던가.
로포텐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랜버그였다. 그 곳에서 우리는 나흘 밤을 지냈다. 여기서 잠시 노르웨이 물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보통 환타 같은 음료수 한 병에 90 크로네인데, 우리 돈으로는 1만원이 넘는다. 가벼운 식사를 하는데 보통 400크로네가 든다, 우리돈 거의 5만원이다. 택시 기본 요금이 200 크로네, 우리 돈으로 2만7천원이다. 올레순 공항에 처음 도착하여 탄 택시 요금 50유로는 사실 이곳 물가로는 적정가였다. 세금은 보통 수입의 30% 정도 된다고 한다. 높은 수준의 복지에는 높은 수준의 세금이 동반되는 것이다.
로포텐 남쪽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은 아마도 레이네와 함노이일 것이다.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이 몇 점씩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데 산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하늘과 산을 비춰주는 바다는 코발트빛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지붕이 날카로운 삼각형이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눈이 지붕에 쌓이지 않고 잘 흘러 내리게 하기 위함이다. 지붕 색깔은 빨강이다. 집안에는 방금 잡아 온 생선이 마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트를 타고 2시간 정도 나가면 새들만의 천국인 섬을 만날 수 있다. 어종이 풍부하고 인간의 접근이 거의 없으니 저들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후 시간이면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즐긴다. 차 한잔 시켜 놓고 몇시간이고 앉아 있다.
6월의 로포텐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 자정의 시간에, 잠시 저렇게 해가 넘어가는듯 하다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새벽 3시면 다시 뜬다. 우리가 묶고 있는 숙소 바로 앞이 해변이고 해변 건너편에 마을이 있다. 검은머리물떼새가 많이 출몰하는 곳이다. 잠시 앉아 있으면 새들은 나타나서 시끄럽게 짖어댄다. 참 시끄러운 새이다. 사람들을 별로 피하지도 않는다. 여행 중에 갖가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늘 이런 분들이 계신다. 낯선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어디서 왔느냐 묻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그런 사람들 부부를 만났다. 뻘쭘하게 대하는 내가 부끄러워 진다.
6월 19일 로포텐을 떠나는 날 아침, 새 들은 또 저렇게 시끄럽게 울어 댔다. 저녁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백야의 고장에서 해변에 낭만 같은 것은 없다. 가다 오다 수없이 만나는 풍경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쓸쓸하다. 일주일간 같이 지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날이다. 좋은 사람들인데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아침 일찍 해변에 나왔는데 몸 컨디션이 약간 이상하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코에서 무언가 냄새가 나는 듯하다. 저녁 늦개 까지 바다에 나와 있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대단치않게 생각을 했었는데 하면서 로포텐을 떠났다..
오슬로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공항 부근에서 자고 난 뒤 아침에 한 목조교회를 찾아갔다. 특이한 구조의 목조 교회이다. 이 교회를 찾아가는데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고마운 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슬로 버스 터미널에서 교통편에 대해 문의를 하니 안내 봉사를 하는 듯한 아주머니께서 교통편을 검색한 후 메모지에 써 준다. 그리고 표 끊는 매표기까지 안내를 해준다. 그렇게 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표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9시30분 버스가 아니라 11시25분 버스이다. 지체없이 나는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다. 아주머니는 느닷없이 책상을 정리하더니 나를 데리고 버스 타는 곳으로 가 주었다. 그리고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20여분 후 버스가 나타나자 그 아주머니가 기사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나보고 버스를 타라고 했다. 정말로 고마웠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목조교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클레어로부터 온 메일이 하나 있었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를 들려 주겠다고 했다. 집에 잘 도착한 것은 좋은 소식이고 나쁜 소식은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양성’ 이라는 것이다. 아뿔사,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다를거야 하고 스스로 안심을 시켜야 했다. 우리는 같은 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나는 거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도 코로나이지만 혹시라도 입냄새가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이다. 이제 부터 코로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6월 20일 목조 교회를 다녀와서 오후 6시경에 PCR 검사를 받았다. 한국으로 들어 가려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고 음성 반응이 나와야 귀국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21일 아침, 결과를 확인하러 검사소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아침에 숙소를 나서는데 뭔가 이상했다.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 질 뻔하지 않나, 먹는 약이 두 동강이 나 있지 않나. 클레어의 확진 소식도 내심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8시 30분경 검사소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세하다. 담당 직원이 나의 여권을 보더니 수많은 검사 결과지 중에서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춘다
“양성 POSITIVE”
딱지가 붙어 있다, 그게 설마 나일까. 설마 나의 것 이었다. 나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그 직원에게 매달렸다. “내일 가지 않으면 나는 큰일이 나, 그러니까 내일 출발할 수 있게 좀 도와줘” 통 사정 이야기를 했으나 담당자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뭔가 잘 못되었어, 아니 이 검사 기기는 잘 못되었을 거야. 다른 곳에 가서 다시 검사받아야 해. 그 길로 공항으로 내달렸다. 공항 검사소에 도착하여 다시 검사를 신청했다.
또 양성 반응이다. 머리 속이 하얗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일단 K항공 카운터를 찾았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편 예약을 변경해 달라고 사정을 해야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는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시내 예약센터로 가라고 했다. 예약센터는 한국도, 노르웨이도, 전 세계 K항공 전화가 불통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정신없이 1주일 후인 28일 항공편을 찾았다. 아무거나 예약을 했다. 하다보니 정신이 없어서 두 편에 예약을 했다 400만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나는 취소를 하려고 했더니 환불금은 0원이다. 이런 가운데 신용카드 한도액을 다 소진하였다. 호텔 예약도 연장해야 했다. 그러느라 몇 시간을 공항 한 구석에서 보냈다. 이제 정신을 차리자 하면서, 공항을 나서서 오슬로 시내에 들어 섰다. 오후 시간에 태양은 왜 그렇게 황금빛으로 빛나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즐겁게 떠들어대는지, 마치 검은머리물떼새들 처럼 그 즐거움이 쉴새가 없다. 나는 신듯한 기분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디찬 맥주를 두 잔 연거푸 마셨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 오는데 속이 이상했다. 급하게 되었다. 서둘러서 걸어 가는데 숙소가 어디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갔던 곳을 또 가고 그리고 돌아 나오고 몇 번이나 반복을 하고 있었다. 뒤는 점점 급해졌다. 간신히 숙소 간판을 발견했다. 마지막 스퍼트를 내어야 했다. 숙소 현관에 다다른 순간 그런데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지에 실례를 했던 것이다. 정리를 하고 방의 커튼을 닫으니 방안은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바깥은 백야라서 밤이 낮인데 이 곳은 낮이 어둠이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빛이 없는 동굴 속에 나는 갇혀 있었다.
시간이 남아 돌아 당초 일정에 없던 여행을 연장하여 트롬쇠로 가게 되었다. 크게 기대를 했었는데 가서 보니 그냥 추운 어촌이었다. 시내에 한국산 경차 한 대가 그 조그만 체구로 귀엽게 달리고 있었다. 공연히 반갑고 눈물까지 났다. 멀어지는 차를 한참 동안 지켜 보면서 배웅을 했다. 트롬쇠는 북쪽 지방이다. 겨울이 8개월 지속된다.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 여름 아니 봄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춥다. 6월의 중반을 지나가는 중에도 산에는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트롬쇠 다리를 걸어서 가는데 우리나라 한겨울 느낌이다. 볼을 때라는 바람과 차가운 냉기가 저절로 손이 주머니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집이든 집 안으로 들어가보면 참 따스하다. 난방이 잘 되고 있는 것이다.
트롬쇠에서 한나절 투어에 참가하였다. 가이드가 나를 보자마자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다.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자기는 인천에서 얼마동안 지낸 적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독일인인데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영어도 아주 능통한 재주꾼이었다. 어느 이름 모르는 해변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잠시 머물렀다. 가이드가 해변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해변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플라스틱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확인해 주고자 함이었다. 참가자 모두들은 추워서 웅크리고 있는데 가이드는 보통 열심이 아니었다. 해변 오염에 나는 관심을 느낄 기분이 아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이윽고 점심 먹으러 따라 간 곳은 산 속 호수였다. 여기서 샌드위치로 소풍 기분을 내 보았다. 뜨거운 물과 함께 잠시 앉아서 참가자들끼리 웃었다. 물론 나는 웃지도 못하고 끼여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나는 거기서도 그냥 한 명의 아웃사이더일 뿐이었다 투어 중에서도 나는 귀국 항공편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유시간이 되면 일단 가장 빠른 날짜의 비행기 편에 다시 예약을 하기로 하고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신용카드는 이미 한도액에 다다랐다. 그런데 신용카드 한도액을 늘리는 방법을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받게 되었다. 일단 사용한 전액을 일괄 결재를 하면 한도액이 살아난단다. 살아난 한도액을 이용하여 29일 런던 경유하는 비행편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귀국하는 비행편은 예약이 하늘에 별따기이다. 전 유럽이 항공대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이다. 이때 클레어 할머니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자기는 어제 음성 반응을 받았다는 것이다. 좀 안심이 되었다. 긴 어둠의 동굴을 지나 빛이 보이는 듯 했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27일 다시 검사를 했다. 그러나 역시 양성이다. 그래서 28일 예약도 취소해야 했다. 일순간 나는 나의 국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나는 분명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나의 여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나라에 가지 못한다. 살아 있으나 사실은 죽어 있고, 죽어 있으나 살아 있는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사냥꾼 그라쿠스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 든다. 대한민국 국민이나 대한민국에 갈 수 없는 그라쿠스가 바로 지금 나의 신세다.
그리고 29일 예약은 일단 그대로 두고 7월 4일 비행기에 예약을 했다. 편도가 무려 300만원짜리이다. 검사소 직원 말로는 양성 받은 후 10일 지나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질병관리청 홈피에 가보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7월 4일 비행기에 예약을 했던 것이다 .
트롬쇠에서 돌아와 이틀 간은 시간 보내는 일이 큰 일이 되었다. 이곳 저곳 다녀 보아야 관심 가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드론을 들고 공터로 갔다. 드론을 날리려고 하는데 오늘따라 경고 문구가 뜬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그냥 무시하고 띄웠다. 그런데 이게 무언가. 기체가 공중에서 빙그르 돌면서 조종기로 제어가 되지 않는다. 순간 기체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화면에 잠시 보이는 것은 물가에 있는 시멘트 장벽이었다. 이윽고 그 화면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찾으러 이리저리 분주히 다녀 보았다. 허사였다. 기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한참 동안 찾아 다녔지만 없었다. 허무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사공이 젓고 있던 배의 노를 잃어버리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고 했던가. 어부가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으면 그때서야 그물을 잊어 버린다고 했던가. 나는 그동안 하늘을 보지 않고 드론 조종기 화면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제 드론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9일 아침
어차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짐을 싸들고 공항으로 갔다. 이번에는 신속항원 검사를 신청했다.또 양성 나올것을 예상하고 덤덤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음성이란다. 그래서 29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날아갈 듯 하다라는 기분이 어떠한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출혈이 컸다. 우선 비행기표 구입에 거금이 들어갔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은 표는 거의 환불이 되지 않았다. 저렴한 비행기표는 대부분 환불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불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기도 하지만 그들은 환불을 반기지 않는다. 그런 비행기 예약은 취소해봐야 한푼도 받지 못한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들의 규정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이로써 나의 마지막 여행이 끝이 났다. 다시 혼자서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 보았다. 잘 지켜지지는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어쨌든 드디어 나는 어둠의 동굴에서 빠져 나왔다. 이제 밝은 세상으로 간다. 나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반추를 해 보았다. “음악은 마지막 음정을 향해서 연주되지만 마지막 그 음정이 그 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나는 누군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목적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정의 하나 하나 한 순간 한 순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었을까. 이제 검은머리물떼새의 울음도 그칠 것이다. 사냥꾼 시라쿠스는 다시 살아나리라. 날아 오르는 비행기 바깥에는 노르웨이의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