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은 시를 무엇이라 하는가
시인은 사람의 의식에
물을 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아름다운 시 한 편 정도는 품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시인들 만큼 언어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시 자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 보면 아마도 갖가지 이쁜 표현이 동원되리라 생각된다.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도둑이 제일 싫어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시인이라고 한다. 가져 갈 것은 없으면서, 들키면 놓아 주지 않고 밤새도록 자기 시만 지겹게 읽어 주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시란 능동적인 악과 부도덕한 활력에서 터져 나오는 지옥의 노래라고 한다.
또 시는 번역되지 않는 ‘그 여백’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는 번역되고 남는 ‘그 의미’에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 속에서 시어를 토해 낸다는 '고음(苦吟)'이란 딱 그의 시 쓰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보 역시 "시는 시인의 운명이 완성되는 것을 증오한다."라고 했다
아폴리네르에게 시란 '사람의 그림자'였다
키츠는 한 편지에서 "나무에서 나뭇잎들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자연적으로 우러나오지 않는 시라면 아예 나오지 않는 편이 나을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시인은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도 했다. 좋은 시는 여성의 가슴을 닮은 심장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고, 좋은 시인이란 '어떤 개성이나 고정된 성격'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에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여성적 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시인이란 '손가락으로 여러 감각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악기'와 같은 존재이다.
말라르메에게 시란 '언어로 사유하는 부재'였다. 시인 또한 부재의 일렁임으로 언어를 이끌며 백색의 종이를 항해한다. 말라르메는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쥘 위레와의 대담에서)으며, 그 책은 "요컨대 단 한 권밖에는 없다고 확신하는 책"이며 “시인의 유일한 임무인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적 설명"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라고 했다. (대문자) 책(Le Livre)을 말한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 파블로 네루다
시는 사람을 사람이게 한다. 대체로'모르겠는 게 시이고, 늘 '아닌' 게 시이고, 문득 '부르는’게 시이고, 툭 건드리는 게 시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시는 항상 누군가와 결혼해 있다.나는 시인, 내 사랑 그대여, 나는 그대 있는 아득한 곳이 물을 대주는 마른 우물 운반자이다. - 르네 샤르
시인은 단방향의 항구적 복원력을 지닌 인간이다
한편의 시는 욕망으로 머무는 욕망의 실현된 사랑이다
시인은 투사하는 한 존재와 붙잡는 한 존재의 탄생이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공허를 빌리고, 사랑받는 여인에게서 빛을 빌린다. 그 정중한 한 쌍, 그 두 명의 파수꾼이 애절하게 시인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시인은 이렇게 권고한다. "몸을 숙이세요, 좀 더 가까이 몸을 숙이세요." 자신이 쓴 페이지에서 매번 무사히 빠져나오는 건 아니지만,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올리브 한 알의 영원불멸을 활용할 줄 안다
한 편의 시는 맹렬한 상승이다. 그리고 시는 바싹 말라 버린 강둑의 놀이다.
시인에게는 두 개의 시기가 있다. 시가 모든 면에서 그를 구박하는 시기, 그리고 시가 미친 듯이 안겨 오는 시기.
시는 모든 맑은 강물 중에 제 위에 비친 다리의 영상에 가장 덜 지체하는 강물이다
문학들이 결국은 '잡음'의 예술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독자가 소비하는것은 소통의 그 장애이고, 메시지의 그 결함이다. 모든 구조화가 그를 위해 구축하고 양식들 가운데가장 귀중한 것으로 그에게 내미는 것은 하나의 반소통이다. - 롤랑 바르트
시인이란 '시와 사랑만이 삶과 세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율법'이라고 믿으면서 시와 사랑이 의무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다. - 랭보
오늘날 시는 문화라는 이름의 바디 스타킹'으로 대체되었다.시의 화자 “나”는 언제나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가면 또는 페르소나라는 독단이다 - 해럴드 블룸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 조지 오웰
시 또한 듣는 것이 아니라 엿듣는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시인은 인간의 감응력을 개조하기 위해 일한다. 시를 통해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살아 있는 지각력 안으로 진입하며 그들의 지각력을 어떤 식으로든 바꾼다 - 일레인 스캐리
시인은 아이의 떠듬대는 여린 입을 모양 잡으며
천하고 흉측한 말들로부터 귀를 돌려놓으며
사랑스러운 말들로 성정을 바로잡아주니, 시인은
사나움과 질투심과 분노의 치료사입니다. - 호라티우스
호메로스도 졸 때가 있었다, 평범한 시인은 인간들도 신들도 책방주도 용서치 않는다, 정상에 못 미치면 그대로 바닥일 뿐, 애비유골에 오줌을 눴나, 같지도 않은 시에 죽자고 매달리다니, 간결하려고애쓰다 모호해진다, 태산이 몸을 풀어 생쥐가 태어났다 - 호라티우스
좋은 시가 좋은 삶과 무관하지 않다
눈물 짓는 나를 보겠거든네가 먼저 아파해야 하겠고, 그때 네 불행이 날 울리리라, 시인은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해야 한다, 시인은 유쾌하며 인생에도움이 되는 걸 노래해야 하고, 달콤하면서도 쓸모 있는 것을 잘섞어야 한다. 독자에게 즐거움과 교훈을 줘야 한다.- 호라티우스
횔덜린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의 열성은 물러나버린 신에 대한 사유를 언어에 담는 일이다. - 알랭 바디우
오늘날 시의 명령은 자기 고유의 무신론을 쟁취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언어가 지닌 능력의 내부에서부터 향수에 젖은 어투, 약속의 태도, 또는 '개방'을 향한 예언적 사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시는 우수에 젖은, 유한성의 수호자일 필요도 없고, 침묵에 대한 절대적 숭배의 재단일 필요도 없으며, 있음직하지 않은 문턱의 점유일 필요도 없다. 시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할 수 있는 것의 환희에 몰두해야 하며, 불가능한 것의 지점 바로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의 무한한 융기를 분간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라쿠라바르트Lacoue-Labarthe가 시의 산문 되기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이것이 주디스 발소Judith Balso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페소아Pessoa의 이명동인 異名同人 카에이루Caeiro의 시가 형이상학이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깃발로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이리라. 카에이루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는 "자신의 시들로 산문"을 쓸 것을 선언한다. 카에이루는 신들에 대해 그들은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았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신들에게 파토스의 방향으로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에이루는 평온하게, 우리와 더불어 상호 무관심을 유지하면서, 신들은 잠을 잔다고 선언한다. 어쨌든 간에 적어도 20세기 초부터 자기 고유의 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 그리고 선고할 것은 바로 시 그 자체다.- 알랭 바디우
"시는 침묵이다.” " 존재는 그 침묵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는 시 속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시는 밝혀준다.그러나 시는 숨김으로써 드러내 보여준다 - 이진경, '불온한 것들'
시인 셸리는 시적 숭고함을 정의하기를, 독자로 하여금 쉬운 즐거움을 포기하고 더 어려운 즐거움을 택하도록 설득하는 경험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보여 주는 것은 시(詩)는 즐거움을 주는 일 이외에 아무런 사회적 기능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해럴드 블룸
시란 엿듣는 것, 자신을 엿듣는 것이다. - 밀턴, '세익스피어'
시란 언어로 시구를 쓴다는 특수한 예술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더 일반적이고 원리적인 과정, 즉 사물의 내적 존재와 인간 자신의 자기내적 존재 사이에 이뤄지는 깊은 교감 관계를 의미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시는 모든 예술에 내재하는 비밀스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 마리텡, '예술과 시에서의 창조적 직관'
브라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것'이다.
'시는 아이디어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단어로 짓는 것' 즉 언어의 물질성 이다. - 말라르메, 베르그송
시인들이 우리에게 이 세상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멋진 곳을 살짝 들쳐 보이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그 한복판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시인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녕성과 필연성의 질서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려는 모순. 그것이 문학이죠." - 김형중 비평가
쉘리Shelley는 「시를 위한 변호Defence of Poetry」에서 '시'라는 개념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시'라는 단어는 '상상력의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확장된 의미에서시가 '인간의 기원과 동시에 생겨난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시는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영향력이고, 신성한 어떤 것...단번에 지식의 중심과 경계에 있는 것이며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는 다른 모든 사유 체계들의 뿌리이자 만발하는 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의 삶의 시인이 되어야 한다 - 니체
자연 자체가 우리 인간이 쓰는 시이다
시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들이다. - 쉘리의 격언
곽희郭熙가 11세기에그의 저서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찬탄할 만하지 않은가?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요,그림은 형태있는 시라고 했다."
바로 화가 자신이 그림의 대상에서 느꼈던 감동(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며,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고, 즉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감동을 시詩라고 한다. 언어 작품으로서의 시를 시 작품이라고 구별해 지칭해 본다면, 시 작품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즉 주관적인 감성적 내면에서 벗어나 있는 언어로써 시를 표현하려는, 즉 원칙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기도라고 하겠다. - 르네 위그, 보이는 것과의 대화
시는 우리가 시들게 버려둔 것에 물을 뿌려 준다. 마치 감정이란 완전히 땅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싹과도 같은 것이기에.
시를 출현시킨 첫째 원인은 모방 본능이고, 둘째 원인은 선율과 리듬에 끌리는 본능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역사가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같은 책)
니오베는 슬픔에 빠져 고향인 리비아의 시필로스 산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울다가 돌이 되고 말았고, 돌이 된 후에도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같은 책)
시는 청각적 예술작품이 전체적으로 그 안에서 분열되어 극치로 감싸질 때까지 언어의 리듬과 음조 요소를 강조한다. 결국 바로 이 시 자체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장 강렬한 표현을 만들어 낼 때까지 이 의미는 구절의 청각적인 효과와 완전히 절제된 관계를 갖는 듯하다 - 게오르그 짐멜, 배우의 철학)
칸트와 후대의 칸트주의자들은 취미 판단이 인식 판단이 아니며 아름다움이란 - . 따라서 예술도 - '개념 없이 ohne Begriff' 마음에 와 닿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에 따르면 관찰자는 아름다움 앞에서 '무관심한 만족감 interesseloses Wohlgefallen'을 가져야 한다. 반면 헤겔은 예술 작품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 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술이란 '가상을 향한 선한 의지'인데, 그에게는 바로 가상이 본질이나 진리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니체는 개념적인 진리 역시 수사학의 비유로 해체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자가 내세우는 진리조차 결국은 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브룩스의 관점에 의하면 시란 무엇보다도 음성으로 이루어진 구조물, 듣기 좋은 소리 euphony, 또는 말하는 방식(Poetry as a way of saying")으로 파악된다.
아름다움이란 '개념 없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윌리언 엠프슨,애매성의 7가지 유형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은 무언가를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수수께끼처럼 된다. 이때 미학 이론의 과제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대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 텍스트는 '기표의 은하수 galaxie de signifiés'로서 어떤 종류의 기의 구조 structure de signifiés'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문학은 음악에 가깝다 - 페터 지마, 비판적 문학이론과 미학
"예술은 무엇을 말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 - 아도르노
휠덜린의 설명에 따르면 시는 곧 “존재의 창조”이다 창조는 즉 명명命名으로 존재를 명명하고 신성을 말한다 이것이 탈은폐의 과정이다 무엇이 사유인가? 사유의 본성은 존재를 생각하고 존재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집합 (불러모으는) 과정이다 사유는 불러 모으기이고 불러 모으는 사유가 곧 시가의 원천이다 시의 본성은 사유속에 깃들어있다 하이데거는 “걵축하기 거주하기 사유하기” 글에서 강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예로 들면서 불러모으는 사유를 해석한다 다리는 자신의 방식으로 하늘 여러 신 그리고 죽으려는 사람을 자신에게 불러 모은다
키츠의 시 가운데 「시는 의미할 게 아니라/존재해야 한다」는 아치볼드 머클리이시(Archibald MacLeish)의 주장에 동의했을 성 싶은 대목이 많이 있다. 이 유명한 송가(頌歌)에 영감을 불어넣은 희랍 항아리는(그것이 실물이든 혹은 상상에 의한 것이든) 키츠에게 있어서는 돌 위에 새겨진 한 편의 시처럼「만질 수 있으면서도 말없는 한 편의 시와 같았다고 생각할 만한 어느 정도의 근거까지 있다
엘리어트가 표현한 바와 같이 그의 임무는 언어를 「의미 속으로 이탈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어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야말로 엄밀한 임무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상적인 어휘라면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의미를 지닐 것이며, 어휘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는 의미의 추상적인 분자가 아니라, 의미의 잠재력, 의미들의 관계 혹은 집단으로 파악돼야 한다.시 속에 담겨 있는 진술을 고찰해 보면 그것은 물 속에 담겨 있는 막대기처럼 비틀리고 휘어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 브룩스, 잘빚은 항아리
시는, 진정한 시라면, 현실의 상(像)이다 - ㅡ브룩스, 잘빚은 항아리
시는 기독교건 마르크스주의건 혹은 그밖의 무엇이건간에 종교나 철학의 시녀가 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시들은 아무리 객관적인 시라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면 실제로 인간 자신에 「관한」시로서 판명된다. 시는 종교나 과학과 더불어 「은밀한 형이상학이다. 시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면서도 그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은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밀 파게는 “현대의 서정시에 필요한 무의미의 입자(粒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
우리에게 시란 보통 '산만하고 '말로 표현될 수 없거나 민감한 것의 기표이며 분류될 수 없는 인상을 분류한 것이다. -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언어의 비단은 순식간에 구겨지는 희미한 주름이다. -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라캉은 자신의 조어인 라랑그를 말하면서 시와의 차이를 말한다. 라랑그는 말하자면 사적 언어이고 아이들이 자폐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향락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 반면, 시는 주체가 라랑그의 향락을 일단 단념하고 문법을 받아들임으로써 공통의 언어속에서 대타자를 상대로 창조하고 대타자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향락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헐벗고 지낸 30년 동안
마흔 번 크게 화를 냈고
마흔 번 중 마흔다섯 번을 대궐같이 높은 베들럼에
고이 갇혀 있었다오
부드럽고 앙증맞은 턱수염을 기르고
용맹한 수갑을 차고, 달콤한 채찍 소리가 딩동
건강에 좋은 굶주림은 아주 많았지요.
그리고 지금 나는 노래한다네, 아무 음식이나, 먹을 거라면 아무거나
먹을거나, 마실 거나, 입을 거.
숙녀도 아가씨도 오세요, 겁낼 것 없어요,
불쌍한 톰은 아무것도 해치지 않아요. (스코틀랜드 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