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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Sep 23. 2024

우연이 말을 걸어 온다

우연이 왕래하는 경로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우연한 만남이다. 

-사랑의 둘은 타자성 일반에 대한 우연적인 성찰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느 때인가 우연이라는 사물 - 사물인지 개념인지 잘 모르겠다 - 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말만 걸어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지고 꼬집고 재채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대체 이 우연이라는 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 저것을 통해서 한번 살펴본다. 


1. 소설속에 나타나는 우연의 연속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처럼 우연이 이야기의 본질 역할을 하는  소설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인 토마시는 테레사를 만나고 같이 살게 된 이야기를 회상한다. 우연의 연속에 대해서 말이다. 소설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그 한 번의 우연으로 나는 테레사 곁에 와 있다.  그 무서운 6개의 우연 때문에 말이다. 

1) 테레사에 살고 있던 도시에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생겼다. 

2)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과장이 갑자기 좌골신경통에 걸려 내가 급히 그곳으로 호출되었다. 

3) 나는 테레사가 고용된 호텔에 들었다. 

4) 열차가 떠나기엔 시간이 남아 호텔 술집에 들렀다. 

5) 테레사가 그날 당번이었다. 

6) 테레사가 나의 테이블을 맡았다.

그런데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수록 보다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나 않을까? 테레사가 나에게 코낙을 가져다 준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린것도 우연일까? 테레사가 은밀히 신분상승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책을 들고 내 테이블에 왜 앉아 있었던가. 우연은 주술적 사랑을 꿈꾸게 한다. 내가 6호실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렇게 우연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6호실에 계시다니

-뭐가 이상하지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이혼하기 전에 그녀가 머물렀던 프라하의 건물이 6번지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와 운명을 바꿀 용기를 테레자에게 주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 그가 그녀에게 내밀었던 이 명함보다는 우연(책, 베토벤, 6이라는 숫자, 광장의 노란 벤치)의 부름이었다. 그녀의 사랑에 발동을 걸고, 끝나는 날까지 그녀에게 힘을 준 에너지의 원천은 아마도 이런 몇몇 우연들일 것이다그녀는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당신은 6호실에 머물고 나는 6시에 근무가 끝나거든요.

테레사와 나를 잇게 해줄 용기는 4가지 우연에 의해서 기인한 것이다. 

1) 책 2) 베토벤 3) 6이라는 숫자 4) 광장의 노란 벤치

테레사는 '안나 카레리나'라는 책을 언제나 놓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뒤에 묵직하게 끼워져 있는 것은 베토벤 4중주의 무거움처럼 안나 카레리나라는 이 책, 가벼움을 더욱 진중하게 해준다. 그녀가 더 이상 시골 호텔의 웨이트리스가 아닌, 휴일에는 형제들의 더러운 속옷을 빨아야만 하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 책만 들고 있으면, 나의 테레사에게 돌아왔을 때 프라하의 교회는 6시의 종을 치고 있었다. 이 6시의 우연을 필연으로 운명으로 다가와 그녀를 들뜨게 했다. 마냥 행복하게 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도 우연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작품에는  '존재의 우연성'이 주제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모습과 직면하였을 때 느끼는 낯설고 구토를 일으키는 부조리한 감정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룬다. 

“구토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를 빨리 떠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병이나, 일시적 발작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란 대자존재는 하나의 존재현상이다. 권태에 묻혀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편안하게 느껴질때,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며 실체의 껍데기 속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고통을 이겨내고 최후의 순간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새로운 고통을 달갑게 맞이하고 다른 아픔을 겪으며 매 순간 새로운 구원을 스스로 행하여야만 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이 나타나서 만나도록 자신을 내맡긴다. 하지만 그것을 '연역'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들은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이 됨직한 것을 생각해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어떠한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지워버릴 수 있는 허상이나 외관이 아니라 절대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無償)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공원, 이 도시, 그리고 나 자신도 무상이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때가 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모든 게 표류하기 시작한다. 요전날 저녁 때 '철도회관'에서처럼 말이다.‘구토' 다. 그 더러운 자식들, '코토 베르' 나 다른 곳의 그 더러운 자식들이 그들의 권리를 휘둘러 숨겨 보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 얼마나 가엾은 거짓인가. 아무도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무상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무의미한 존재라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자신의 내부에서 '무의미한 존재다. 형체도 없고 막연하고 서글픈 존재인 것이다.

그 매혹이 얼마 동안이나 계속됐을까? 나는' 마로니에의 뿌리 ‘였다’. … 갑자기 나무 뿌리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 존재는 지워져 버렸다. 내가 아무리 그것은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저기에 있다, 의자 아래 내 오른발 옆에 있다고 되풀이해도, 그것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존재란 멀리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들고, 우리 위에 멎어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살찐 짐승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것들은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하게 그 목숨을 유지하다가 우연한 만남에 의해 죽는다”

그가 느낀 구토증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였는데, 결국 존재란 그 자체가 우연이고 부조리이며, 존재 모두가 의미와 필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도 우연을 빼 놓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셀이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무의식적으로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자각한다. 시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서 그가 찾아낸 것은 예술적 자아다. 유추하자면 예술만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는 시간성이다. 시간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은 `스완네 집` 같은 하나의 공간이다. 


삶의 우연성이 사정없이 펼쳐지는 또 하나의 소설은 폴 오스터가 쓴  ‘공중 곡예사’(원제 Mr.Vertigo)’ 이다. 길고 긴 작품 마지막에 등장하는 번역자(번역자 황보석) 의 말처럼 이 글은 과연 "우연"이라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월터의 인생은 결코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겹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월터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길을 꿋꿋이 찾아간다.

사실 많은 이들은 삶에 불행이 닥치면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내가 문제인가?' 혹은 '쟤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 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알려주는 건, 사실 생각보다 많은 불행과 불운이 그저 뜻하지 않게 닥친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불행들에서 월터는, 다시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열두 살 때 물 위를 처음 걸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꼬마 월터가 자라면서 삶에 대해 깨달아 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많고 많은 소설에는 거의 우연이라는 유령이 등장하고 맹활약을 한다.  실로 스토리가 황당무계 할 수록 우연의 비중은 그 중요도가 커 질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협지이다. 

주인공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절벽아래 동굴속 같은데 떨어져서 다죽어가는 상황에 바로 그곳 낭떨어지 아래 동굴속에 있던 은둔고수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무술을 배우게되는 이야기라든지, 김용작 ‘영웅문’에서는 곽소천과 양철심 두 의형제가 한날 한시에 두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정강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곽정, 양강'이라고 이름 짓자고 약속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일대 혼란이 벌어지면서 두 명의 아내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곽소천의 아내 이평은 저 먼 북쪽의 초원에서 '곽정'을 낳았고, 양철심의 아내 포석약은 동북의 금나라 황실 안에서 '양강'을 낳게 된다.그 다음 이야기는 상상에 맡기자. 


2.인간의 근본적 우연, 하이데거의 경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피투와 기투를 언급한다.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유한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극 사이에 처박혀진, 해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불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주위세계를 배려하고 동료 인간들을 심려하고, 자기 자신에는 염려로 처신하는,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nichtigen Kreatur)’”

인간은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청탁을 받거나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의사와 관계없이 탄생된다. 인간은 수억 개의 정자 중 한 개와 한 개의 난자가 결합하여 탄생한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도, 탄생 자체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가 없다. 인간은 수동적이고 우연적인 존재이고, 하나의 던져진 존재(being thrown)에 불과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피투성(被投性)이다.

인간은 한편으로 피투된 유한하며 제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를 미래로 내던질 수 있는 기투 존재의 '고유성'이 필연성을 가능하도록 한다. 나는 나의 존재 근간을 벗어날 수 없고, 또한 그 존재의 가능성에 따라 살 수 있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에 내던져져 있고, "자신의 가능성에 입각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나 기투라는 행위도 여전히 기존의 세계에 묶여 있으므로, 기투란 언제나 피투적 기투 (geworfenes Entwerfen)일 수밖에 없다


3.형이상학적 우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automaton와  tuché를 말한다.  automaton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우연이라는 의미가 있고 반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tuché는 운이라는 의미인데, 현실계와의 조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본질과 우연성(튀케)으로 나누고, 범주를 통해 모든 존재를 분류하는 것이다.

'튀케'란 행운과 불운, 행복과 불행, 요행과 치명과 같이 '인간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가 생성되는 것을 ‘자연에 의한 것, 기술에 의한 것, 우연에 의한 것’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예컨대 ‘자연에 의한 것’이란 풀씨에서 풀이 나오듯이 같은 종에서 같은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기술에 의한 것’이란 집이라는 관념에서 그와 같은 집의 형상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기술의 경우에서 생성이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이다. 그래서 인과의 논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려운 문제는 바로 ‘우연’에 의한 생성이었다.

현실에서 보면 대개 원인이 있어 결과 있는 법인데, 우연이란 이런 직감과는 괴리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든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마침 연회에 나갔는데, 돈을 빌린 사람을 만나 다행스럽게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분명히 돈을 돌려받기 위해 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돈을 돌려받게 된 원인은 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나가려 한 ‘의지’였다.

이렇게 원인을 가지고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우연 혹은 행운이라 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체적인 원인과 부수적인 원인을 구별하여 사태를 설명한다. 연회에 나가려 한 ‘의지’는 연회에 ‘참석한 것’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는 데 성공한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우연’(아우트마톤)과 ‘운’(튀케)을 구별한다. 운은 우연의 하나이며, 인간의 활동에 한정한다. 돈을 돌려받은 것은 우연이자 운이다.


4.우연의 고전, 보에티우스 


11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연이나 우이 偶爾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는 없는 건가요? 혹은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저 말에 적합한 뭔가가 있는 것일까요?" 

12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자연학》에서 간략하고도 참에 가까운 원리로 정의하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13 "어떤 것이 어떠한 일을 위해서 행해졌는데 원래 목적했던 바와는 다른 것이 어떤 원인들로부터 생겨날 때 우연이라고 한다. 이는 밭을 갈려고 땅을 파다가 깊이 묻힌 금덩어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14 그렇다면 이 일은 우연하게 벌어진일이라고 믿어지지만 실제로 무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원인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 원인들의 예기치 못하고 예상치 못한 조합이 우연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5 만약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파지 않았다면, 금 주인이 그 자리에 금을 묻어 두지 않았다면, 금은 발견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16그러니 이런 것들이 우연한 이익의 원인들이며 그 일은 의도대로 행해져서가 아니라 여러 원인들이 만나고 합쳐짐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17 즉 금을 묻은 자나 밭을 경작하는 자가 그 금이 발견될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금을 묻은 곳을 다른 사람이 파내는 일이 벌어지고 그러한 일들이 합쳐진 것이다. 

18 그러니 우연이란 다른 목적으로 행해진 일들에 여러 원인들이 합쳐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원인들을 만나고 합쳐지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합과 함께 진행되는 저 질서이며 질서는 섭리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것을 제자리와 제때에 맞게 배치한다."

(‘철학의 위안’ 중에서 인용) 


5. 우연의 철학적 고찰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연대   

리처드 로티는 책의 제목에다가 우연을 달았다. 그는 세 가지 우연성에 대해서 설파를 한다. 언어의 우연성, 자아의 우연성, 그리고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이다. 먼저 언어의 우연성에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양심,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등 모든 것을 시간과 우연의 산물로 여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 이른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우연이 우리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자아의 우연성과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불변의식(필연성)'과 '특수의식(우연성)'과의 관계를 분석하

면서 "불변(필연성)이 특수(우연성)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우연한 사건"이라고 말한다.우연은 설명되기까지 빠져나갈 수도 없고, 단순한 현상으로 무시될 수도 없다. 우연은 필연

적 관계로 설명되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우

연을 필연성으로 엮어서, 세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우연적 사례를 어떻게든 수용할 만한 것

으로 설명해야만 한다. 과학과 철학에 있어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하나는 "우연성을 지나

치게 강조하여, 자연과 정신의 세계에 정당성을 주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

노력에 의해서 우연적 현상을 결정적인 필연으로 드러내거나 선험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는 것"이다. 헤겔은 "과학과 철학의 문제는 우연을 가장하여 숨은 필연성을 끌어내는 데 있

다"고 보았다.

어떻게 철학이 우연에서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을까?

헤겔에 따르면 우연성이란 단순한 주관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자연과 정신세계에서 다 함

께 일어나는 일이다. 헤겔은 현실태의 운동을 분석함으로 우연에 대한 필연을 설명하고자

했다. 여기서 얻은 단서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연성은 필연성으로 “止揚(지양; Aufheben)”되는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비판하기를, 목적론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기독교인)은 무질

서, 설명할 수 없는 재난, 원인 없는 고통, 일관성 없는 사건을 만나면 "우리는 그것들의 목

적을 모를 뿐이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헤겔은 다음 같이 말했을 것이다. “주변 세계를 해석할 때, 우연과 필연이 대립한다. 우연은

필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헤겔이 '우연'보다는 필연을 선호하는 구절을 발견하기는 쉽

다. 「철학사 강의』에서 철학을 "필연성의 학"으로 정의하였고, 심지어 "우연성은 철학의

출현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성이 철학의 출현과 더불어 사라질 것 같지 않은 구절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불변의식(필연성)'과 '특수의식(우연성)'과의 관계를 분석하

면서 불변(필연성)이 특수(우연성)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우연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1) 우연은 형식적 현실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연의 가능성은 필연으로 설명된다.

현실태는 외향성을 지닌 내향성, 곧 본질을 지향하는 실존적 운동이기 때문에 늘 가능성으

로 남아 있다. 운동은 잠재적일 때 발현기에 가능태이다. 가능태가 현실성이 되는 순간, 운

동은 정지하고 이 순간 만큼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아야 한다. "A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라

는 말은 “A는 A이다"라는 현실태로 완성된다. 현실태는 다시 다른 것이 될 가능성을 그 안

에 씨앗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가능태이다. 가능태는 언제 현실태가 되는가? 가능태와

현실태의 통일은 우연성에 있다. 우연적인 것은 동시에 다른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는 현실

태이다. 현실태로서의 우연성과 그 안에 있는 가능태 사이에는 "절대적 불안”이 있다. 각자

는 즉시 그것의 반대자로 변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 타자

에 대한 자아의 동일성이 필연성이다.

2) 상대적 필연이 실제적 현실태가 되면, 우연의 가능성 역시 필연이 된다.

상대적 필연성은 우연의 "시작"이다. 상대적 필연성은 "우연적 현실태”로 정의된다.

속에서 우연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揚(지양; aufheben)”된다. 변증법적 지양을

에서 우연은 필연으로 바뀐다.

3) 인류의 세계 전체에는 “절대적 필연성"의 맥락이 흐르고 있다.

절대적 필연성은 현실태와 가능태의 운동 형식을 통해 우연이 필연으로 물러나는 진리라고

헤겔은 말한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데는 정신적 반성의 자기 변증법적 운동이 있다. 자기 반

성과 같은 순수 본질은 단순한 직접성 혹은 순수한 존재이다. 순수한 본질 존재는 단순한 자

아 내로의 반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절대적 필연성은 "절대자의 반성적 형식이다. 헤겔에

게 있어 "절대자의 반성적 형식"은 세계 내에 있는 개인이나 부족, 민족의 반성적 규정이 아

니다. 세계전체를 아우르는 인류 정신의 반성적 규정 형태이다. 이를 고대철학이나 기독교

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같은 "절대신"으로 보면 안된다. 본질적 존재인 신이 아니라, 실

체적 신이 없는 인간 실존적 삶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 정신"을 "절대정신"이라고 말한다.

"절대자"는 기독교 신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절대정신"을 말한다. 절대정신에서 순

수 본질은 인간의 상대적 실존들의 통합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연성의 총합이 절대적 필연

성이 되는 것이다. 실존적 존재들은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립하는, 즉 타자의 모습을 통

해 자신을 돌아보아서 분화된 현실성으로 존재하는 차별적 반성 존재들이다. 이들 반성운

동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필연성이라는 절대적 동일성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실태가

가능태로, 그리고 가능태가 현실태로 전환하는 전체를 통해 하나의 필연성에 이를 때 절대

적 동일성이라 한다

(‘헤겔 역사철학’ B.T.윌킨스 즈음,  3장 우연성과 필연성에서 인용)  

    데리다  

데리다는 모든 의도(intention)에서는 우연(chance)의 발자취를 찾게 된다는 얘기를 한다. 의도는 우연의 부재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완전한 우연 혹은 완전한 의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만약 모든 상황이 완전하다면 우연이나 사고가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현대사회는 오히려 우연과 의도 사이에는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 투성이다.

세계가 그 어떤 "즉자적 필연성을 주장할 수 없"고 "우연한 생성들에 의거"하는 곳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남을까?   

    메를로-퐁티  

"그 누구도 역사를 만들지는 못하며, 풀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지 못함과 같이 아무도 역사의 생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존재자들과 사물들의 '기이한 구성'이라 할 사태형성 événement은 바야흐로 현상학이 자신에게 부여한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의외성)와 '나는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필연성)라는 두 양상은 이제 사건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튀케Tuché 식(式) 우연hasard)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튀케'란 행운과 불운, 행복과 불행, 요행과 치명과 같이 '인간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적 원인 연쇄로서의 우연인 아우토마톤 automaton만이 사건 배후에 숨겨진 단순 징후가 아니다. 이와 같이 튀케는 현상들에 대한 외부 원리가 아니라 인간처럼 목적이 내재하는 존재를 '위한' 그리고 이 존재에 '의한' 불가항력으로 해석된 운명적 원인이다. 어쩌면 사태들이 달리 돌아갈 수 있었고 돌아가야만 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위해서만 저 운명의 실상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저 우연의 사건이라는 것이며, 여기서 인간 존재는 사건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변형시킬 무언가를 찾을 것이고, 따라서 이 존재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 부여할 능력과 의무를 알고 있으며, 필경 그 자신이 실제 상황 내부의 합목적들로 정향된 주체가 되는 것이다. 튀케- 우연(偶然)은 인간을 향해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운명(運命)과 진배없다. 그리스 비극 속에 편재하는 주요 개념들, 곧 '포착된 기회'라는 의미의 카이로스Kairos와 인간에게 '의미를 흘리는 튀케는 정념과 의지, 허약성과 결단력, 육체의 유한성과 역사의 영원성이 혼합된 영역과 관계를 맺고 있다. 전쟁도 바로 이러한 차원으로부터 유출되고 있으며, 인간들이란 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초월하고 있는 저 비극의 책임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클로드 시몽은 프루스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변환시키고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삶터에서 저술 속으로 옮겨 가는 살아 있는 작가" "이고, 그의 이야기란 생활에서 작품으로의 '이행의 담화'인 것이며, 결국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찾아서』라는 탐구적 작품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반면 클로드 시몽의 이야기란, 모든 것을 다 보지 않은 채 누군가가 이야기해준 것을 믿은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인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클로드 시몽의 누보로망’, 신인섭)   

    퀑텡 메이야수  

우연성은 물리적 법칙들이 일률적으로 어느 한사건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 존재자의 창발,존속, 소멸을 가능하게 한다는 - 사실을 가리킨다 

절대적 우연성은 순수 가능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오로지 이것만을 “우연성” 이라고 명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완성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소멸되어야 한다고 단언하는것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명제가 될 것이다 

우연성은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며, 있는 그것이 그것으로 남아있다는 것 모두를 기리킨다. 

우리는 우연성의 필연성이 사물 그 자체에 관해서 칸트가 공식화 했던 다음 두 가지 진술, 사물 그 자체의 사유 가능성을 보장하는 두 가지 진술의 절대적 진리를 부과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물 그 자체는 비-모순적이다  

사물 그 자체가 있다  

우리는 비이성과 관련된 두 개의 존재론적 진술들을 획득했다  

팔연적 존재자는 불가능하다  

존재자의 우연성은 필연적이다  

비이성 원리의 약한 해석은 우연성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잇다면, 그것은 우연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이성 원리의 강한 해석은, 우연성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물들이 우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것과 우연적인 사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비이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약한 해석, 원리의 최소한의 의미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사실성과 우연성은 다르다.

세계의 명백한 비이성(이유의 부재)이 비이성 그 자체(이유가 부재하는 다르게-되기의 실제적 가능성)이며, 우리에 대한 비이성(필연적 이유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에 대한 (비이성) 그 자체로의 이행은 필연성, 우연성에 있어서 불가능하다.

우연성 : 어떤 것에 대해 지속되거나 사라지는 것과 무관한 가능성

       내가 규정된 사물의 실제적 사멸성에 대해 갖게 되는 앎

       실제적인 유약함, 비-존재의 가능성

사실성 : 우리의 본질적인 무지를 지시.

      사물들 자체의 속성. 안다고 가정되는 속성.

우연성contingence 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contingere 프랑스어 arriver 와 관련되는데, 그것이 일어나는것, 그렇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적임 그것은 요컨대 어떤 것이 마침내 일어날 때이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 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게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마침내 진지한 것들이 시작된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적인 지점은 - 이것은 ‘존재와 사건’의 지도적 직관을 구성하

우연성이라는 용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계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적인 지점은 계산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사유가 여전히 수학적 사유라는 것이다.

상관주의가 단정하는 필연적 존재의 불가능성은 모든 존재가 다르게 존재하는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가 우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카오스 속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자는 다름아닌 필연적 존재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의 비-필연성의 절대적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 모든 사물의 우연성의 절대적 필연성을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존재자들은 순수한 우연성의 시간 내에서, 시간 외적 시간인 우연성이 필연성이 되는 시간 내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카오스의 극단적 형태, 초-카오스이며, 사실상의 비사실선인 본사실성을 구성한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법칙의 와해는 칸토르의 초한수와 그에 따른 총체화될 수 없는 집합론에 의해 해결되고, 우연성의 필연성은 합리적 타당성을  얻는다. 요컨대 흄이 열어놓은 문제, 즉 경험적 우연성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에게서 논리적 필연성을, 데카르트에게서 수학적 사유를 빌려와야 한다. 

모든 수학적 진술의 본질적인 기준 자체로부터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의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유일한 le 논리학을 절대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유일한 le 수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선조적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사변적 사유의 토대다.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6.신에 대한 우연성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


우주론적 논증의 세 가지 버전은 토마스적 우연성 논증, 라이프니치의 충분한 이유 논증, 칼람 논증이다. 토마스적 우연성 논증을 통해, 우발적인 것들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 "우연적인 것들"은 표면상으로는 존재하기 시작했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실체들, 그리고 그 존재가 다른 실체에 의존하는 실체들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우연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그것들의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필연적인 것 (또는 존재)만이 우연적인 것들―표면상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존재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이 필요한 것(또는 존재)은 하느님이다. 우주론적 논증의 일부 최근 버전은 우연적인 것들이 다른 우연적인 것들의 인과적 사건들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왜 우주가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속 질문한다. 아퀴나스와 라이프니츠의 논증의 요소들을 모두 활용하여, 이 최근 판본들의 핵심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우연적인 것(그리고 무한대로)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떤 우연적인 것의 존재를 다른 우연적인 것에 의해 설명하는 것은 어떤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티모시 오코너는 이렇게 주장한다.만약 우리의 우주가 정말로 우연적이라면, 어떤 근본적인 사실들이나 다른 것들의 획득은 우연적 실재의 위상학적 구조가 무엇이든 간에, 경험적 이론 안에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시공간 우주 안팎에 있는 존재들의 무한한 퇴보는 그러한 결과를 막을 수 없다. 궁극적 또는 완전한 설명이 있으려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이고 우연적인 사실들을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인 존재, 즉 그 자신의 본성 안에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무조건적인 설명은 어떤 식으로든 조건적이고 경험적인 설명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경험적 설명이 완전한 설명의 더 큰 구조 안에 포섭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유신론과 궁극적 설명: 우연성의 필연적 형태. Oxford, Blackwell, 2008, 76)


7 정신분석에서 우연이란, 라캉


<에크리』의 서막을 장식하는 ‘도둑맞은 편지’ 의 텍스트의 도입 부분에서 라캉은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0과 1의 연속에 관해 설명한다. 이 연속에는 어떤 법칙성도 없지만 그것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별하면 하나의 법칙을 갖는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투케 개념을 다루고 있다. 투케는 현실계와의 우연한 조우를 의미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면 인간이 최초로 조우하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와의 조우를 통해 생물학적 존재일 뿐이던 인간이 태어난 환경에서 떨어져 나와 언어적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현실계와의 조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러한 사유가 라캉에게 기본적인 것이었지만 1970년대에 와서는 그러한 조우가 남긴 것을 일자라고 부르고, '일자가 있다'는 명제를 정신분석의 기본 명제로 제시한다. '일자가 있다'는 것은 '대타자는 없다', '성적 관계는 없다'와 같은 부정적 명제에 대한 유일한 긍정이며, 이것을 축으로 정신분석의 초석을 닦을 수 있게 된다.

'일자가 있다'는 것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다룬 하나의 명제로 형이상학적으로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이것이 정신분석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느 것과 관련되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대단히 강력한 명제이다.

왜냐하면 일자란 인간이 언어와 조우할 때 남겨진 흔적으로,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겨져 반복 현상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것을 S1으로 표시한다. S1이라고 표시되는 것은 그것이 최초의 시니피앙이고 단독적으로 실재 existence하는 시니피앙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 우주, 자연, 음악에서의 우연


왜 우리는 이 우주에서 존재 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중우주 이론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무수히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우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조건을 가진 우주에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중우주 이론은 인간 존재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우주는 수많은 우주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도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을 갖춘 우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특별하거나 유일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우주의 무한한 다양성과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우주의 탄생은 순전히 우연의 소산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빅뱅은 우연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일으켰는지, 잘 모를 뿐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우연적인 작용일까? 과학적 인과의 사슬이 일으킨 필연인가? 바람이 갑자기 북쪽에서 불어오고 안개가 계곡을 뒤 덮을 때 우리는 종종 참 우연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날 과학은 자연 현상에 관해서는 대부분 해명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예측까지 실행한다. 그래도 우연이라는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의문 부호를 마구 내지르게 한다. 내가 돈을 세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세고 있던 돈을 날려 보낸다. 이를 과학으로 예측할 수 있을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우연성음악에 속한다고 한다.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저 악보만 쳐다보고 악보를 넘기는 액션만 취하는 것을 보며 청중들이 의아했던 작품은 당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우연성 음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작곡과정에서 작곡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우연에 의해 작품을 창작하는 방식인데, 존 케이지에 의해서 처음 시도된 이런 음악을 불확정성 음악 또는 우연성음악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하나의 방향은 악곡의 부분 및 전체 구조를 정하고, 연주하는 과정에서 연주자가 독자적으로 작품의 진행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주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이 방식은 알레아(alea)라고 부르는 데, 알레아는 주사위, 우연 등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차용된 개념이라고 한다. 

 중국의 고서 <주역>에 심취해 있었던 존 케이지는 변화와 우연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재료의 선택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즉, 악기나 음향 또는 음높이나 강약을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만들지 않고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우연적인 요인으로 결정하고, 작품을 연주할 대도 연주의 순서나 방법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음악을 쓴 것이다. 이로써 음악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정된 작품틀은 이제 존재하지 않고 작품은 연주할 때마다 새로 태어나는 셈이다. 대표적 작품은 존 케이지의 1951년에 발표된 <Music of Changes>이다. 여기에서 음고와 지속시간, 음색 등은 주역에서 나온 도표를 활용하고 세 개의 동전을 던져서 결정한다. 그는 <윌리암 믹스>(1952), <상상의 풍경>(1951) 등에서 우연성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우연에 대해서 가볍게 이모저모 살펴 보았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우연 사례들이 아직도 여기서 제기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 남은 시간동안 더 찾아 보리라고 다짐해 본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많은 일들이 우연으로 생기는 현상인가, 과연 

우연 뿐일까, 우리가 아직까지 몰라서 쉽게 우연으로 치부할 뿐, 필연적 조우일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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