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욕구와 요구와 어떻게 다른가
욕구와 요구 그리고 욕망
욕구는 신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신체나 정신적으로 만족이 되지 않을 때, 욕구불만이라고 하지 요구 불만 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편 요구는 언어적인 것이다. 그리고 욕망은 욕망은 욕구와 요구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욕구가 생리적인 유기체의 필요에서 비롯된다면 요구는 이것을 언어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욕구와 요구는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데 욕구를 완전하게 요구로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욕망은 욕구와 요구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달리 말해 어떤 욕구를 시니피앙 연쇄 속에서 대타자를 향한 요구로 전환시킬 때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욕망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신체에 기원을 둔 욕구가 언어적 법칙에 맞게 표현되는 요구로 전환될 때 배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는데, 욕망은 여기에서 욕구와 요구의 불일치 혹은 차이처럼 나타나게 된다. 이 차이는 구조적인 것으로 라캉은 이것을 욕구와 요구의 분열(spaltung)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욕구와 요구의 분열은 사물의 살해 위에서 구축되는 상징계의 본성에서 비롯되며 주체는 이것을 결여의 형태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것을 특정 대상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 결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소외란 욕구가 언어로 표현되면서 왜곡되거나 불가피하게 포기되는 부분이다. 가령 연인에게 자신의 간절한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늘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온갖 사랑의 말을 해도 마음속에 부족함이 남는 것이다. 요컨데 욕구need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desire은 그렇지 못하다. 항상 욕망할 다른 어떤 것이 남아있다.라캉은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히스테리의 특징은 만족되지 않은 욕망인 반면 강박증의 특징은 불가능한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욕구가 모두 충족되는 상황이라면 요구가 불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굳이 언어를 익힐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일까? 이런 상황에 이른다면 아마도 인간은 멸종하고 말 것이다. 무엇 때문에 ? 존재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결여가 있고 이 결여를 매꾸려는 의지가 삶을 지탱한다. 그러니까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생존에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이 욕망의 시작이다. 아이는 수수께끼 같은 어머니의 욕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욕망의 주체로 태어난다. 이 끊임없는 탐구 자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아주 확신하지 못하는 의문의 태도가 간략히 말해서 욕망이다
라캉이 세미나7에서 욕망을 칸트의 절대 윤리에 비교한 것은 욕망이 대상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순수 의지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윤리적 행위에서 정념이나 목적성을 배제하고 선의지 자체만 기준으로 삼듯이, 라캉은 욕망을 대상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순수 욕망désir pur' 이라고 정의한다.
욕망은 결국 주체가 상실한 존재, 즉 실재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다.거꾸로 금지 때문에 욕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금지는 주체에게 그 너머에는 절대적인 향유의 대상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소망하고 있는 것이 욕망인가 아니면 순수한 창조적 욕구인가? 욕구라면 편안하게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욕망이라면 원하는 결과에 촛점을 맞추기 전에 그 욕망이 표상하는 결핍과의 화해가 먼저이다.
‘욕망’으로 번역한 원어 ‘에피티미아’(epithymia)와 ‘욕구’로 번역한 ‘오렉시스’(orexis)에는 일종의 포함 관계가 존재한다. 즉 욕망은 욕구에 포함된다. 욕구는 좀더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불레시스’와 같은 합리적 바람이나 지금 논의하고 있는 욕망, 분노(thymos)와 같이 인간의 이성적·비이성적 추구 일반을 의미한다. 반면에 ‘에피티미아’는 일반적으로 비이성적인 추구 중에서 식욕이나 성욕을 느끼는 것과 같이 생물학적인 조건으로 인해 불러 일으켜지는 육체적인 욕구나 추구를 지시한다.
욕망의 목소리
'진리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그것은 바로 욕망의 목소리다.
욕망이 désir; desire 프로이트의 용어인 소원(Wunsch)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대상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힘의 작용을 말한다. 욕망의 본질은 존재 결여이며,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오브제 a'이다. 라캉은 욕망을 생물학적 본능인 욕구 및 그것의 언어적 표현인 요구와 철저하게 구별하는데, 욕망은 요구가 욕구와 불일치하는 가장자리에서 발생한다. 욕망의 본질은 대타자로부터의 인정 욕망이며, 상징계의 작용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언어에 의해 촉발되고 대타자의 욕망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는 것에서 상징계적 작용에 종속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욕망이 존재 결여의 표현이라는 면에서는 상징계의 작용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욕망의 최종 귀착점은 실재에 대한 충동인 죽음 충동, 즉 주이상스다. 결국 실재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후의 영역이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내면적 의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타자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소외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중에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고 정식화한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대상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완벽한 욕망의 충족을 꿈꾸는 것, 그것은 거울 단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요구는 결여를 낳고 다시 결여가 요구를 되풀이하게 만드는 상징계의 작용이 바로 욕망이며,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욕망은 무의식의 욕망으로 남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욕망과 대상의 영원한 어긋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며, 그런 까닭에 욕망하는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상징계는 결여를 낳기에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주체가 존재 결여 manque à être; lack of being 때문에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고 할 때, 여기서 존재 étre: being"가 바로 실재에 속한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의 대상은 현존하는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잃어버린 대상이다. 그것은 평소에는 값어치가 없고 끌리지도 않지만 상실을 통해서만 소중한 대상이 된다. 잃어버린 대상은 주체의 잠재된 향수를 자극하면서 환상적 구조 속에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그 사람이 가고 나면 더 없이 소중해지면서 그 가치가 새롭게 재평가된다
욕망은 한편으로 언어에 의해 촉발되고 대타자의 욕망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는 것에서 상징계적 작용에 종속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욕망이 존재 결여의 표현이라는 면에서는 상징계의 작용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욕망의 최종 귀착점은 실재에 대한 충동인 죽음 충동, 즉 주이상스다. 결국 실재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후의 영역이다.
욕망의 삼각형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제안한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우리의 욕망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욕망의 주체 (고객), 욕망의 대상 (제품 또는 서비스), 욕망의 모델 (롤모델 또는 이상적 상태)이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은 단순히 제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그 제품이 상징하는 가치나 상태를 욕망한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브랜드가 놓치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돈키호테가 스스로 되고자 했던 것은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이다. 그런데 그의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전설적인 기사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그의 욕망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자연발생적인 수직적 초월의 욕망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중개자(médiateur)를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기사가 되고자 하는 간접화된 욕망이다. 이처럼 중개자를 통해서 암시를 받고 갖게된 욕망을 삼각형의 욕망이라 한다.
주체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주체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부른다. 지라르는 이 이론을 통해서 현대의 시장경쟁 체제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욕망을 설명하려 한다.
그는 또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사교계의 여왕이 되고자하는 엠마 보바리의 욕망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사춘기 때 읽은 삼류 소설과 잡지에 나온 사교계의 여왕으로부터 암시 받은 중개된 욕망이고,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쥘리앙 소렐을 가정교사로 데려오고자 하는 레날씨의 욕망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경쟁자 발르노 씨가 소렐을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부터 암시 받은 중개된 욕망이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대부분의 주인공의 사랑이 경쟁자의 존재로부터 암시 받은 중개된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지라드는 돈키호테(세르반테스)』,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뿐 아니라 『적과 흑(스탕달)』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 의 작품에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적용한다.
'보바리 부인'에서 상류 사회를 동경하는 엠마의 욕망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사춘기 때 읽었던 삼류소설 주인공의 욕망을 빌려온 것으로 나, 욕망의 대상, 타자가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그 삼각형 구도를 통해 지라르는 어떠한 인물의 욕망이 독창적이라는 낭만적인 믿음은 거짓, 또는 자기기만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타자가 이미 욕망한 것을 자신도 향유하려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욕망의 기본 구조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존재하게 된다. (욕망의 삼각형)
(주체: 보바리 부인, 대상: 파리 사교계, 중개자: 삼류소설 속 파리 여인들)
(주체: 돈키호테, 대상: 기사도, 중개자: 아마디스)
주체가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주체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부른다. 지라르에게 욕망은 모방 충동이다.욕망의 삼각형(Desir triangulaire)'은 르네 지라르(R. Girard)가 그의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용어이다.
소비자심리학의 대가 애런 아후비아 박사는 인간이 더 나은 사회적 평가를 위해, 타인과의 애착 형성을 위해, 더욱 나답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물에 사랑과 애착을 쏟을 뿐 아니라 구매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며, 때로는 생명이 없는 사물과 대화를 시도한다고 말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열쇠이자 사람 간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감정적 애착을 사람과 사물 사이에 형성시키는 심리적 장치 ‘관계 난로’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