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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Dec 18. 2024

32화. 산과 구슬

<흑마법서> 소설 연재

 “김혜성, 마지막 경고다. 차에서 내려.”

 석정 사랑이 말했다.

 “내리지 않으면 이 두 놈의 머리를 날려 버릴 거야. 이건 진짜 총이다.”

 운전대를 잡은 경호원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나가시면 안 됩니다.”

 혜성은 온 몸이 떨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공자님......”

 혜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문 열어 주세요.”

 “공자님, 제발......”

 “어서요. 열어 주세요.”

 경호원이 할 수 없이 차 문을 열자 혜성은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구만, 우리 공자님.”

 석정 사랑이 말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 차 안에 여의주가 있지? 어서 내놔.”

 혜성은 애써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붕새의 여의주 말이야. 빨리 내놓으라고. 다 알고 있어.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해.”

 “붕새...... 젠장.”

 혜성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넌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노예 새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석정궁을 초토화시켰지만 부하들이랑 간신히 탈출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았냐?”

 석정 사랑의 가느다란 눈매에 웃음이 번졌다.

 “어떻게 알았어?”

 혜성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가 우리 2호점에서 석판을 파내는 걸 우리 애들 중 하나가 목격했다. 이 석정 사랑이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지. 그날부터 바로 너희를 미행하고 도청했어.”

 “도청까지......”

 “그래. 그랬더니 드디어 모든 게 아귀에 맞더군. 네가 애초에 왜 내 술을 훔치려고 했는지, 그 이전에 왜 하윤과 약혼했는지 말이야. 붕새의 여의주라! 그런 게 진짜 있었다니. 네 덕분에 백두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 그만 그걸 넘겨. 넘기지 않으면 너랑 같이 온 사람들은 다 죽는다.”

 혜성은 석정 사랑의 뒤에 잡혀 있는 이태민과 박준식을 쳐다봤다. 그 옆에는 김구름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두 명의 경호원도 붙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혜성은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한적한 주차장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 지르는 순간 이 녀석들을 쏴 버리겠어. 다시 말하지만 이건 진짜 총이다. 못 믿겠으면 한 번 보여줄까?”

 석정 사랑이 단단히 붙들린 이태민과 박준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의 머리 뒤에는 여전히 권총이 겨눠지고 있었다.

 “자, 그럼 붕새의 여의주를 당장 내놔. 내놓지 않으면 여기 이 고양이부터 죽이겠다.”

 혜성은 손이 떨렸다.

 “싫어? 그럼 할 수 없군.”

 석정이 뒤돌아서는 순간 혜성이 외쳤다.

 “잠깐만! 알겠어. 주면 되잖아.”

 혜성은 차에서 투명한 구체를 꺼냈다.

 “이리 던져.”

 “그 전에 사람들부터 보내.”

 석정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 지금 나랑 거래하는 거 아니야. 빨리 던져.”

 “그럼 이걸 넘기면 다섯 명을 모두 안전하게 풀어주겠다고 약속해.”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안 되겠다, 얘들아. 고양이를 쏴라.”

 “알겠어, 알겠다고!”

 혜성은 다급하게 외치며 구체를 던졌다. 석정은 자신에게 날아온 물건을 낚아챘다.

 “신기하게 생겼군.”

 석정이 잠시 구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말했다.

 “네가 내 술을 훔쳐간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알겠으니까 모두 당장 풀어줘.”

 혜성의 말에 석정 사랑이 부하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붙잡고 있던 네 사람을 놓아줬다. 두 직원과 두 경호원은 일어나서 혜성 쪽으로 걸어왔다.

 “다들 괜찮으세요?”

 혜성은 그들에게 말하다가 다시 석정에게 소리쳤다.

 “우리 이사님도 풀어줘야지!”

 “누구? 아, 이 포메라니안? 네가 데려가.”

 석정은 그렇게 말한 뒤 옆에 세워져 있던 차로 걸어갔다. 다른 부하들도 각자 여러 대의 차에 나눠 탔다. 차들은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혜성은 쓰러져 있는 김구름에게 달려갔다.

 “이사님! 이사님!”

 혜성은 김구름의 몸을 흔들며 외쳤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김구름의 머리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피가 그의 하얀 털을 물들였다. 혜성은 김구름을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2주가 지났다.

 그 날 김구름은 곧장 백두산 근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김구름은 그 병원에서 며칠 있다가 매려 왕국의 중앙병원으로 옮겨졌다. 여왕의 특별 지시로 매려 최고의 의사들이 김구름을 돌봤지만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혜성 일행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직후 석정 사랑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이태민과 박준식은 경찰에게만 맡겨두지 않고 석정 사랑을 찾기 위해 탐정을 세 명이나 고용했다.

 서점으로 돌아온 후 혜성은 처음에는 여의주를 되찾을 방법을 열심히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지쳐가고 무기력해졌다. 어렵게 손에 넣은 여의주를 그렇게 허망하게 빼앗겼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분통이 터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혜성은 다시 서점 안의 그의 방에 틀어박혔다. 그는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그럴수록 그의 무기력증은 더욱 깊어져 갔다.

 ‘나는 맨날 왜 이 모양이지.’

 그는 생각했다.

 ‘그래, 내 인생이 어차피 그렇지 뭐. 난 늘 운이 나빴어. 애초에 내가 여의주를 찾아낸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야. 내 인생에 잘 되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는 점점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 들었다. 주문을 써보려고 했지만 쓸 힘이 나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 노트에 마법 문자를 몇 글자 끄적이다가 펜을 팽개쳐 버렸다.

 ‘이 짓을 해서 뭐해? 어차피 책을 만들 수도 없는데. 여의주를 영영 잃어버렸잖아.’

 그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센스의 가사를 떠올렸다. 창작의 고통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구절이었다.

 ‘아직 내가 못 꺼내놓은 게 있어. 그것만 찾으면 가짜와 내가 구분될 수 있어.’

 가짜와 내가 구분될 수 있어. 예전에 그는 그 가사를 믿었다. 자신의 속에서 주문을 꺼내면 진실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어느 순간부터 뭔가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문을 쓰는 것보다 책을 만들 재료를 찾는데 더 정신이 팔린 거지.’

 그리고 이제는 그 재료조차 사라져 버렸다.

 혜성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가 방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공책도 집어 던졌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는 건지 우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웃는 쪽에 가까울 것 같았다. 멍청한 자신을 비웃는 쪽.

 ‘내가 그렇지 뭐.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혜성은 책상에 기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수천 번도 넘게 고민했던, 제국과의 계약을 거절한 것? 물론 그랬다면 여의주를 찾기 위한 그 모든 노력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의주를 잃은 이 지독한 상실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님도 다치지 않았겠지. 다 나 때문이야.’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제국과 계약하지 않은 것 때문일까? 정말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일까?

 아니다. 그는 마침내 진실에 도달했다. 문제의 진정한 원인은 그게 아니었다. 진정한 원인은, 바로 자신이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헛된 꿈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는 것, 그것이 진짜 원인이었다.


 “처음부터 마법사가 되려고 하지 말 걸 그랬어요.”

 혜성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김구름에게 말했다.

 “저를 열심히 도와주신 이사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애초에 이 길은 제 길이 아니었나 봐요. 저도 그냥 우리 부모님이 예전에 저한테 말하던 대로 평범한 직장인이나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하러 굳이 마법사가 되겠다고 이 고생을 자처한 건지 모르겠어요. 거기다가 제국과의 계약을 거절해서 이 지경까지 되고......”

 김구름은 대답이 없었다.

 “이사님, 죄송해요.”

 그는 김구름이 눈을 뜨길 바랐다. 그의 말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작은 입으로 아니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김구름은 눈을 뜨지 않았다.

 혜성은 김구름 옆에 한참동안 앉아 있다가 눈물을 훔쳤다.


 “나도 사람을 시켜서 석정 사랑을 찾고 있어. 곧 찾게 될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

 여왕의 말에 혜성은 고맙다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마법사를 하지 말 걸 그랬어. 그게 내 결론이야.”

 그러자 여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왜 여왕에게 안 좋은 일을 털어놓을 때마다 웃음이 나올까? 아마도 자신에 대한 조소가 아닐까 싶었다.

 “진심이야. 내가 마법사를 하려는 바람에 내 인생도 망가졌고 다른 사람도 피해를 입었어.”

 “그건 네 탓이 아니잖아.”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혜성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자책하지 마.”

 “자책하는 건 아니고, 그냥 뭐랄까...... 진실을 깨달은 것 같아. 난 마법사를 하면 안 됐어.”

 “그렇게 말하지 마. 나까지 슬퍼지잖아.”

 “네가 슬퍼졌다면 미안. 근데 사실이야.”

 혜성은 다시 웃음이 나왔다.

 “마법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고생을 겪지 않았겠지.”

 “고생 없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긴 하지. 근데 이제 좀 지치네.”

 혜성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지친다.”

 여왕의 커다란 눈망울에 슬픔이 번졌다. 혜성은 그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운 빠지는 얘기해서 미안해. 근데 솔직히 그래.”

 여왕은 혜성은 안고 토닥였다.

 “난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혜성은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한 날들이 계속 지났다. 혜성의 우울한 마음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점점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정신적인 상태가 울적해지다 못해 흐릿해질 정도로 심해진 어느 날,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이태민과 박준식이 혜성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박준식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겁니까?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너무하시네!”

 “날 좀 놔둬요.”

 혜성이 웅얼거렸다.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태민도 혜성 곁으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장님, 이러고 계시니까 정말 시체와 다름없네요.”

 “아마도 맞을 걸요.”

 “사장님의 이런 모습을 더는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문도 안 쓰고 계시죠?”

 이태민의 말에 혜성은 하품을 했다.

 “써봤자 뭐해요. 그리고 저는 애초부터 마법사가 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또 그 소리!”

 박준식이 호통을 쳤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요? 사장님은 불사신 서점의 사장이라고요! 그럴 거면 차라리 사장 자리를 포기하시던가!”

 “그럴까요?”

 혜성의 말에 박준식은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박준식은 혜성 옆에 앉아서 이태민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태민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이미 버렸는데......”

 “그럼 다시 만들어 봐요. 희망이 생겼으니까.”

 혜성은 눈을 뜨고 이태민을 올려다봤다.

 “석정 사랑이 체포됐대요.”

 “네?”

 “우리와 여왕이 고용한 탐정들이 협력해서 석정 사랑의 조직을 찾아내 경찰에 신고해서 일망타진했대요. 근데 놈들의 아지트에서 우리 물건이 나왔나 봐요.”

 박준식이 말을 받았다.

 “놈들이 붕새의 여의주를 비싼 값에 팔려고 갖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장물을 처리하기 전에 경찰에게 잡힌 거죠. 그래서 지금 용산 경찰이 여의주를 보관하고 있대요.”

 혜성은 몸을 일으켰다.

 “그 말은 그러니까......”

 “그래요, 아직 희망이 있어요.”

 이태민과 박준식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마력원을 되찾을 수 있다고요. 책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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