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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May 08. 2021

근현대사 화가들이 화폭에 담아낸 '가족'이야기

화가 배운성, 장욱진의 <가족도>

5월은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과 같은 기념일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이 있는데요. 이 때문에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족과 관련된 근현대작가의 그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근현대작가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림에 담긴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운성 <가족도> 1930년대, 등록문화재 제534호

작가 소개 : 배운성 (1900 ~ 1978)


배운성은 1900년 7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후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학비 내기가 어려워 학교를 중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15세 무렵부터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백인기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배운성은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또래였습니다. 때문에 백명곤의 말벗, 공부 친구, 몸종의 역할을 합니다. 뿐 만 아니라 백명곤의 일본, 독일 유학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백명곤이 병에 걸려 유학 도중 귀국을 하게 되었고, 배운성은 귀국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독일에 남게 됩니다.


그는 독일에서 미술을 배우고, 1927년 당시 유럽 화단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대표적 가을 공모전 살롱 도톤느에 조선인 최초로 출품해 수상했습니다. 이를 시작하는 여러 전시에 입상을 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펼칩니다. 이렇게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럽에서 유학하고, 현지 화단에서 이름을 알린 화가가 됩니다.


1930년대 후반 파리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1940년 전쟁을 피해 급하게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초대 학부장을 지냈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 평양미술대학을 세우고 교수로 재직하며 예술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외국 작가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신의주로 쫓겨나게 되었고, 1978년 세상을 떠납니다.


작품 소개


배운성<가족도>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1400x200cm, 등록문화재 제534호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배운성은 전쟁을 피해 급하게 귀국하느라 작품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라질 뻔 한 배운성의 작품은 불문학자인 전창곤에 의해 발견, 소개됩니다. 그는 유학시절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배운성의 작품을 발견하고, 일괄 구입합니다. 그리고 국내에 소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도>가 알려지게 됩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중,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작가의 서명은 없고,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입니다. 한국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대 가족사진을 연상시키는, 대형 가족초상화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화단에서 활동을 했던 배운성의 대표작으로 가치가 큽니다. 또한 당시 주거와 복식,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 제 5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가족도는 한옥 마당을 배경으로 17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직립자세로 정면상을 보고 있으나, 몇 명의 경우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근대 가족사진을 연상시키며, 근대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하며, 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실존인물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7명이 모여 있음에도 좁아 보이지 않는 이 한옥은 백인기의 집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백인기 가족을 회상하며 제작한, 백인기 가족 초상화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의 증언과 전해지는 가족사진 등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작가 자신의 가족들을 그렸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맨 왼쪽 흰 두루마기입고, 서양식 가죽구두를 신어 멋을 부린 사내는 작가 배운성입니다. 대체로 정면을 응시하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안쪽을 향해있습니다. 그리고 애틋한 눈빛으로 가족 전체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들떠있으면서도 푸근합니다.


가운데 구심점이 되고 있는 할머니는 배운성의 어머니로 추정됩니다. 흑백사진으로 전해지는 배운성 어머니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할머니 발아래, 색동저고리를 차려입은 아이는 조카 정길로 전해집니다.


왼쪽 상단에 불이 꺼진 듯 어두운 방으로 배경으로 있는 남자는 앉아있다고 하기에는 문지방의 위치가 너무 높습니다. 또한 가슴팍에서 뚝 잘린 구도는 마치 영정사진과 같은 느낌입니다. 때문에 1931년 작고한 배운성의 형으로 추정됩니다.


맨 오른쪽 샛노란 저고리를 입고 선 젊은 여인은 얼굴을 살짝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배운성과 닮았기 때문에 그의 오누이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작가가 조선에서 본 것 중 제일 좋은 집을 배경으로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독일로 떠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집의 구조, 인물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고 생생합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욱진 <가족도> 1972년

작가 소개 : 장욱진(1917년 11월 26일 - 1990년 12월 27일)


장욱진은 1917년 11월, 충청남도 연기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살이 되던 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고모의 옆집으로 이사한 후,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시ㆍ서ㆍ화에 안목을 지니고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부보다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며, 미술대회에서 1등상을 받으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입니다. 그러던 중, 일본인 역사 교사에 대들다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서양화가 공진형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면서 3년간 요양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요양을 마친 후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전국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학교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1945년 국립박물관에 취직하여 일을 합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합니다. 하지만 재직 6년 만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남양주 덕소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서울, 수안보, 용인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1990년 12월 27일 사망합니다.



작품 소개

장욱진 <가족도> 1972년 캔버스에 유채 (출처 :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에게 가족은 삶의 근원이자 창조적 영감이었습니다. 또한 가족들이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때문에 가족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작입니다. 또한 작가 자신이 각별히 아껴 장남 장정순씨가 소장해오다가, 2017년 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손바닥만 한 앙증맞은 그림 속에는 네 식구가 집안에 모여 있습니다. 단조로운 구성이듯 보이지만 좌우대칭의 균형 잡힌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형태의 단순미, 색의 절제 등을 통해 대형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몰입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뒤쪽으로 콧수염이 있는 남자는 화가 자신이고, 하얀 옷은 여성은 그의 아내로 보입니다. 아내 옆으로 좀 큰 아이는 아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작은 아이는 딸로 보입니다. 아이들은 두 손을 모으고 앉아있어,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집 주변, 가족들의 동글동글한 얼굴은 태양처럼 붉습니다. 이를 통해 해질녘 노을을 같이 바라보는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작은 집을 배경으로 꽉 차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가족이 움직이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함께 있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붕 위로 까치로 보이는 네 마리 새가 줄지어 날고 있습니다. 새들을 두고 부부, 두 아이, 혹은 네 명의 딸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붕위로 사이좋게 열 지어 날아가는 새들도 아래의 가족처럼 네 마리라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자연을 넘어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남양주 덕소의 어느 주말 풍경으로 전해집니다. 장욱진은 아내는 생계를 위해 평일에는 책방에서 일을 하다가, 주말이면 반찬거리를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남양주 작업실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작가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화가라는 직업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떨어져 지낸 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슬픈 이별은 남다른 가족 사랑을 가지게 했으며, 가족 간의 정을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니 가족들의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의 만남을 뒤로 한 채, 이별해야 하는 모습이 상상되어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두 개의 <가족도>는 가족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 그리운 마음, 이별의 반복으로 애틋해진 가족 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림은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움, 애틋함 등 작가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어떤 감정을 담아, 가족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이현희

참고자료 |

-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눌와

-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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