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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Jun 15. 2021

일제강점기 전통음악은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을까?

종묘재례악, 판소리, 민요

안녕하세요, 한걸음 기자단 박명빈입니다. 여러분 요즘 정말 유행하고 있는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라는 곡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이 음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은 국악의 명맥이 위태롭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전통음악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날의 국악은 크게 전통음악과 창작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창작음악은 작곡가의 창작 행위에 의해 20세기 중·후반 이후에 생겨난 장르인 반면에, 전통음악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공식 의식음악인 궁중음악,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의 음악 애호가들에 의해 향유되던 풍류음악, 평민 계층에서 향유되던 음악인 민속음악, 전문음악인들이 공연을 위해 연주하던 예술음악, 종교의식에서 연행되던 종교음악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전통음악 장르 가운데, 오늘은 궁중음악 중 제례악과 예술음악인 판소리와 산조, 그리고 민속음악 중 민요가 어떤 모습으로 향유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궁중음악 ; 왕실이나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 음악,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조선 왕실의 궁중에서 연행되던 궁중연향이나 연례악, 군례악, 제례악 등의 음악들은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조선시대 궁중의 음악은 장악원에서 관장했으며, 1897년에 교방사로 개칭되었고, 1907년에 장악과, 1910년 아악대로 개칭되며 그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1913년, 왕족과 왕가의 업무를 관장한 이왕직의 재정인 이왕직아악부로 개칭되었습니다.


이왕직아악부는 아악생 양성 및 궁중음악의 보존과 전승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궁중음악이었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이 일본천황의 친족 수준으로 격하됨에 따라 제례의식이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제례악 또한 그 명맥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는 제례의식인 종묘제례와 공자와 그의 제자를 기리는 제례의식인 문묘제례만이 연행됨에 따라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만이 이왕직아악부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종묘제례악 헌가(출처 : 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41집 : 근현대 한국음악 풍경)


1910년 이후 악생과 악공의 수는 점차 계속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의 악대 편성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전체 편성된 악대의 인원수가 감소되었고, 본래 편성에서 악기가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종묘제례악의 일무는 본래 6일무(36명)이었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8일무(64명)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6일무(36명)로 격하되었습니다. 8일무는 1줄에 8명씩 8줄로 줄을 지어서 추는 춤으로, 천자의 제사에서 추는 춤이고, 6일무는 1줄에 6명씩 6줄로 줄을 지어서 추는 춤으로, 제후의 경우에 추는 춤입니다. 따라서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본래 6일무를 추던 종묘제례악은 8일무로 바꾸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의 황실이 격하됨에 따라 종묘제례악의 일무 또한 6일무로 격하되었습니다, 이는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 다시 8일무를 채택하여 현재까지 연행되고 있습니다.


종묘제례악 일무 (출처 : 문화재청)


이처럼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은 일제강점기에 그 전승·보존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도 이를 기록하고 보존함으로써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궁중의 제례음악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현재 종묘제례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예술음악 ; 전문가들이 공연을 위해 연주하던 음악, 판소리

전문가들이 공연을 위해 연주하는 음악인 예술음악 가운데 판소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세기 초기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판소리에서 발전한 창극이나 서양에서 유입된 찬송가, 창가 등이 유입되면서 대중들이 즐기던 음악의 양상이 많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전통음악 가운데 판소리와 같은 예술음악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오늘날까지 보존·전승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일제강점기 당시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판소리는 조선후기, 전문예술인들에 의해 연행되던 소리입니다.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북 장단을 치는 사람)로 구성되며, 소리(창), 아니리, 발림으로 이루어진 음악입니다. 본래 판소리는 굉장히 긴 사설로 이루어져 있어, 한 바탕을 완창하는데 최대 8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20세기 초, 극장이 등장함과 동시에 “창극”이라는 음악장르가 등장하면서 완창의 판소리는 점차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창자가 연행하는 판소리와는 달리, 창극은 역할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맡은 창자들과 무용, 화려한 무대, 관현반주 등 종합예술형태를 갖춘 무대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은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판소리는 완창의 형태보다는 부분적으로 연주하는 토막소리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다양한 음악 예술이 생겨나고 발전하던 시기에 대중들의 취향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판소리의 전승과 보급에 기여한 명창들이 있습니다. “판소리 5명창”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입니다.


판소리 5명창(김창환·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5마당의 토막소리를 경성방송국에서 방송하거나 유성기음반에 취입하며 판소리의 대중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들은 창극단에서 활동을 함께 하며 일제강점기 시절의 판소리 다섯마당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들입니다. 일제강점기, 판소리의 전승과 보급에 기여한 이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판소리가 전승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판소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민속음악 ; 평민 계층에서 향유하던 음악, 민요

평민들의 삶에서 향유되던 가장 대표적인 민속음악은 민요입니다. 민요는 특정 개인이 창작한 음악이 아닌, 생활 속에서 구전(口傳)되어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음악입니다. 따라서 가사는 평민들의 삶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부르는 사람의 즉흥성이 가미될 수 있는 음악입니다. 이처럼 민요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평민들이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판소리와 같은 예술음악과는 다른 민속음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평민들의 삶에서 향유되었던 민속음악인 향토민요의 종류로는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 등이 있습니다. 노동요는 일 할 때, 의식요는 의식을 치를 때, 유희요는 유희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러한 음악은 시대가 발전하며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향유층이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직접 일을 하며 부르던 노동요는 기계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유흥을 위해 부르던 유희요는 새로운 음악들의 탄생으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전문가들에 의해 다듬어져 부르는 민요의 형태로 새로운 형태의 장르가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민요는 “통속민요”라고 부르며, 보다 전문성을 갖춘 음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통속민요가 생겨나면서 평민들에 의해 불리던 비전문적인 민속음악인 민요는 “토속민요”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향토민요를 향유하는 대상은 점차 적어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는 앞선 두 종류의 민요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신민요”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민요”는 말 그대로 새롭게 등장한 민요를 의미합니다. 신민요는 기존의 평민들이 부르던 음악과는 달리, ‘작곡가’가 존재하며, 기존의 향토민요와 통속민요의 특성을 차용하여 창작된 음악입니다. 신민요를 작곡하던 작곡가들이 당시 유행가를 작곡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신민요는 전통민요와 유행가 그 중간에 위치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음반 사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신민요 스타 가수가 탄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 성장하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음반취입 외에도 라디오 방송에도 출현하며 신민요라는 새로운 갈래의 음악을 보급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신민요가수로는 선우일선, 이은파, 왕수복, 이화자와 같은 권번 출신의 가수와 비권번 출신의 남녀가수가 있었습니다.


권번 출신 신민요 가수(선우일선, 이은파, 왕수복, 이화자)(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박명빈

참고문헌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민속원, 2007.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판소리, 신민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종묘제례악, 판소리)

사진출처 |

- 『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41집 : 근현대 한국음악 풍경』, 국립국악원, 2007.(다나베 히사오가 봉상소에서 촬영한 종묘제례악 등가, 헌가)

- 문화재청 (종묘제례악 일무, 일무(문무))

-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선우일선, 이은파, 왕수복, 이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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