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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pr 08. 2021

[한걸음기자단] <<독립신문>> 창간 125주년 기념,

민중과 함께한 언론의 역사를 되짚어 보다.

4월 7일 수요일이 되면 1896년,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독립신문>>이 125번째 생일을 맞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계몽적 대중매체를 꿈꿨던 <<독립신문>>은 일제의 서슬퍼런 감시와 수많은 견제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가감 없이 폭로하고 규탄했으며, 국민주권·민주주의 사상을 기반 삼아 보도하며 민중을 일깨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독립신문>>은 자주독립을 향한 염원을 담아냈을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신문의 중요성을 깨우쳤던 거죠. 독립신문의 투지 넘치는 취재정신과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는 사이다 같은 논조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진정한 시대의 언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많은 민영언론들이 생겨났고 저마다의 논조와 시각으로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곁을 지켜왔습니다. <<독립신문>> 125주년을 맞은 오늘, 민중과 함께한 언론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1919, 3·1운동과 언론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뮤지컬 <영웅>의 대표 넘버인 ‘누가 죄인인가’에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으로 언급된 가사입니다.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900년대 초반, 일제는 조선의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1907년 신문지법, 1909년 출판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를 초석으로 삼아 1910년 조선총독부는 신문발행 허가권을 장악해 한글로 발행되는 민간 신문을 전면 금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시대상황 때문에 3·1 운동을 함께한 언론은 자유를 빼앗긴 채 지하에서 보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신문을 ‘지하신문’이라고 부르는데요,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발간되지 못하고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서 비밀리에 배표되는 신문이라는 뜻입니다.


3·1 운동을 함께한 최초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1 운동이 시작되고 제일 먼저 등장한 지하신문은 <조선독립신문>입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소에서 시작한 이 신문은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전하며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진행상황을 알렸습니다.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1호를 배포한 뒤 바로 다음 날 2호를 인쇄해 전날 시위의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임시정부가 세워질 것이라는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4호까지 인쇄하고 이종린 선생이 체포되며 원고도 모두 압수당했지만 그러나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민중의 곁에서 항일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조선독립신문의 투지 넘치는 행보의 영향을 받아 자유민보, 국민신보, 혁신공보 등의 다양한 지하신문이 민중의 곁을 지켰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하노라.”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들 대신 연단에 뛰어 올라간 어린 학생의 외침으로 시작된 3·1운동.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작은 불꽃들이 모여 거대한 횃불이 되고, 그 횃불이 우리 역사에 새로운 불을 지핀 그 순간을 언론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1948, 제주 4·3사건과 언론

“속솜하다” 제주말로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7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속솜하다”는 말로 묻어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즈음이 되면 집집마다 제사를 준비하고, 우리 집 제사가 끝나면, 이웃집 제사에 가서 인사를 합니다. 섬 인구의 10% 이상이 희생됐던 제주도의 아픈 봄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장기가 거둬진 자리는 성조기가, 친일세력이 앉았던 자리는 친미세력이 대신하게 됐던 그 무렵, 남북은 미국과 소련의 간섭 하에 분리된 정부를 수립해 단독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분단국가가 현실화되는 상황에 반발한 제주도민은 남한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전국 투표율은 95.5%를 기록한 반면 제주 선거구 2곳은 투표율 미달로 무효가 됩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1949년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려 초토화 작전을 감행합니다.


제주 4·3 희생자 분포 지도, 출처 =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노인, 임산부, 아이를 가리지 않고 군인들 눈에 띄는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 육지와의 연결통로 없이 고립된 섬 제주에서는 외로운 비극이 7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해방 이후 가장 비극적이고 대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로 낙인찍힌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묻어두고 쉽게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 특히나 그 역사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던 육지 사람들은 더더욱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은 언론에서 역시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습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폭동’, ‘반란’ 등으로 규정되고 왜곡되어 온 제주 4·3사건에 대한 부채의식은 ‘진실’에 대한 열망을 품게 했고, 진상규명은 제민일보의 심층취재로 이어졌습니다.


제민일보가 창간 이후 10여 년간 기획·보도했던 ‘4·3은 말한다’, 출처 = 제민일보


제민일보의 심층취재는 3·1절 발포사건에 대한 반박보도를 낸 제주신보가 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주신보는 당시 제주의 식량난과 부정부패, 1948년 3월의 고문치사사건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고립되었던 제주의 민중과 함께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제주신보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보도했던 기사들은 훗날 제민일보의 4·3사건 심층취재의 구심점이 되었고, 반란과 폭동이라는 오욕을 뒤집어썼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수면위로 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7, 6월 민주항쟁과 언론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기자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차가운 죽음을 맞았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특종보도를 시작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싼 국내 언론과 외신의 보도가 연일 이어졌고,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한 19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지면, 출처 = 중앙일보


1987년 4월 13일,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로 군사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 분노는 민주화의 물결이 되었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전국적으로 운동이 확산되던 1987년 6월 9일, 직격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또 하나의 젊음,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민주화를 향한 불씨에 더 큰 불을 지폈습니다. 바로 다음날,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던 그 순간 ‘박종철군 고문지사 조작·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작됩니다. 전국 18개 도시에서 24만 여명의 민중들이 참여한 6·10 민주항쟁이 역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언론은 명동성당 농성투쟁에서 시작해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진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외침을 현장에서 함께하며 보도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의 불을 지핀 보도지침 원본 사료, 출처 = 뉴스1


쉴 새 없이 최루탄이 터지고 사방에서 돌이 날아오고…. 1987년 6월의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은 그날을 ‘전장과 같았다’고 기억합니다. 사진기자들은 방독면과 헬멧 없이는 취재가 불가능했고, 외신기자들이 종군기자 수당을 받으며 취재를 할 정도였으니 상황의 참혹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취재기자들은 현장에서도, 내부에서도 싸워야 했습니다. 언론 통제를 위해 매일 각 언론사에 뿌려지던 ‘보도지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그 보도지침도 민중 곁에 서기로 결심한 언론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6월 민주항쟁의 참여 규모를 축소하려던 데스크도 직접 현장을 본 뒤로는 훨씬 더 엄중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펜을 든 이들이 진실을 알리겠다는 의지로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는 후대에 고스란히 전해져 민주화를 이룩하기까지 한국 현대사가 겪어내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료가 되었습니다.



2016, 광화문의 촛불과 언론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0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선고한 주문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라는 의미를 남기며 대한민국의 역사에 큰 방점을 찍었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평화시위를 상징하는 ‘촛불’이 들려있었습니다.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건을 만들어낸 171일 간의 기록 속에 민중과 언론은 역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 관련뉴스

2016년 9월 20일 한겨레신문에서 최초보도 한 대통령 비선실세의 정체, 출처 = 한겨레신문

- 한겨레 ‘국정농단 최초 보도’, 손배소 승소 ; 동춘 전 K스포츠재단 이사장 마사지란 표현 명예훼손 주장에 법원 “사회적 가치·평가 절하 아냐 최서원 개입 고발 공익성 인정



2016년 9월 20일을 시작으로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를 세상에 꾸준히 드러내온 <한겨레신문>, 소문만 무성하던 비선실세가 실제 존재하고 있음을 알린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봇물 터지듯 터져나온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정황은 신문의 1면 톱을 차지하고 TV 뉴스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비선실세 개인을 위해 국고가 낭비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10월 29일, 서울에서 5만 여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직무수행 긍정평가 5%’, IMF 외환위기 때보다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11월 5일 “이게 나라냐”는 분노 섞인 외침이 다시 광화문에 울려 퍼졌습니다. 점점 거세지는 촛불의 열기에 발맞춰 언론에서는 계속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는 국정농단 사태에 관련된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1월 26일, 190만 여명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11월 26일의 촛불, 출처 = 시사저널


처음에는 집회의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해 보도하던 보수언론들 마저도 이 날의 집회 이후로는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대통령의 측근마저도 하야를 건의했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고, 여론의 단호한 태도에 대통령도 대통령직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눈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탄핵에 12월 3일, 232만여 명의 시민들이 청와대 100m 앞까지 촛불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여론에 국회도 화답했습니다.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의 헌법수호 및 준수의무 위배 △최순실 등에 특혜 제공 관련 범죄 △재단법인 미르, 케이스포츠 설립·모급 관련 범죄 등을 사유로 탄핵소추안을 결의했고, 끝까지 불을 밝힌 민중의 힘이 모여 ‘사건번호 2016헌나1’의 현직 대통력 탄핵심판의 탄핵결정이 선고됐습니다.



역사의 시작_민중의 언론

역사의 순간에는 항상 언론이 함께했습니다. 역사의 시작을 언론이 촉발시키기도 했고, 민중의 마음속에 있던 작은 염원의 불씨에 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처럼 언론이 민중을 외면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 결과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빨갱이의 폭동’, ‘공산당의 반란’으로 낙인찍혀 왔고 그 낙인을 지우는 데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언론이 민중에게 등을 돌리면 역사는 제대로 기록될 수 없고,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누군가에겐 또 다른 상처로 남습니다. 사실을 보도하고 권력을 감시·견제한다는 책임과 사명을 저버리고 민중에게 상처를 준 언론은 결국 민중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민영 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선생은 언론의 핵심은 ‘백성의 지지’라고 여겼습니다. 언론은 민중의 지지가 있어야 건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민중의 지지를 위해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출처 =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


미국, 중국, 독일, 호주 등 세계 주요 40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민중은 언론에 등을 돌린지 오래라는 겁니다. 언론이 민중의 편에서 든든하게 확성기 역할을 했던 때도 있지만, 지금의 언론은 그 확성기의 역할에서는 많이 멀어졌다는 것이 민중의 판단인 것입니다. “언론 신뢰도 최하위”라는 민중의 냉정한 심판을 언론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민중 곁에 서는 확성기의 역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 시대의 언론으로 인정받았던 <<독립신문>>처럼 우리 시대에도 지지와 인정을 받는 진정한 시대의 언론이 필요합니다. <<독립신문>> 창간 125주년을 맞아 살펴본 민중과 함께한 언론의 역사, 지금 우리 시대의 언론들이 그리워해야 할 진정한 언론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정예은

사진 출처 | 본문 사진 하단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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