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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pr 08. 2021

민중 계몽에 힘썼던, 독립신문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입니다. 신문의 날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를 찍은 것을 기념하여 제정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신문과 임시정부에서 창간한 신문이 있는데요. 그 중,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입니다.


그렇다면 1896년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일까요?




독립신문 창간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령하였고, 이른바 ‘조선의 보호국화’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사회∙문화 등에 깊은 이해를 가진 지일파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 중이었던 서재필이 1895년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한 서재필은 관직에 들어가는 대신 권력의 외곽에서 민중을 계몽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왜곡된 기사를 양산하고, 일본의 침략정책과 일본 거류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성순보’에 맞대응하기 위해 신문 사업을 벌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 서재필과 유길준은 신문을 창간하기로 합니다. 김홍집 내각은 이에 적극 지지를 표했으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반대로 의해 서재필은 위협에 시달렸고, 독립신문의 발간사업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독립신문』 1898년 2월 24일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그러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고, 유길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하던 큰 배후세력이 상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 이후 수립된 박정양 내각은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신문 창간 사업을 지원하였고, 아관파천 2개월 뒤인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됩니다.



독립신문이란?

독립신문은 1896년에 창간된, 최초의 민간 신문입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 중이던 서재필이 귀국한 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간한 신문입니다. 비록 초기 신문 창간비용으로 정부 지원을 받았지만, 이후 운영 과정에서 독립신문은 구독료와 광고료 수입으로 지탱해간 순수 민간신문입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해 1899년 12월 4일 폐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대한민국역사박관 소장


또한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신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 한글과 띄어쓰기를 책택함으로써 양반이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대중지를 지향했습니다. 또한 영문판은 해외의 독자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데 목적을 두고 발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담당했고, 주시경은 조필로 국문판 편집과 제작을 담당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총 4면 중 3개는 국문판, 제 4면은 영문판으로 구성된 격일간지로 시작합니다. 이후 1897년 1월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을 따로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1898년 7월 1일 국문판을 일간지로 발행합니다.


독립신문은 약 3000부가 발행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합니다. 이 때 신문 한 부를 대략 2~300명이 돌려 읽었다고 추정한다면, 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는 발행 부수의 수십 수백 배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독립공원의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에 새겨진 독립신문의 모습_출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초기 독립신문은 정부에 대한 협조적 태도로 국민 의식과 사상 변화에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기사와 논설로 서구 열강에 맞서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친러 수구파 정권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898년 5월 서재필은 추방됩니다. 이후 윤치호가 운영을 맡았으며, 독립협회 해산 이후에는 아펜젤러, 김벌리 등이 주필을 담당하게 됩니다. 결국 1899년 12월 정부가 인수하면서 독립신문은 폐간됩니다.


독립신문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약 3년 8개월간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각 방면에 걸쳐 수많은 명논설을 남겼습니다. 시기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바뀌며 논조가 변화했지만, 언론의 정신과 사명에 충실했으며 창간 당시의 원칙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또한 정부와 백성의 매개체 역할을 공명정대하게 함으로써 개화기 사회발전과 민중계몽에 관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한글신문으로써 한글의 발전과 보급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호

독립신문 창간호를 통해 신문의 취지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독립신문_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① 공명정대하게 보도

② 전국의 상하 모두가 쉽게 알도록 한글로

③ 백성과 정부의 사정을 상호에게 알려주어 정부 관원의 잘잘못을 감시하고

④ 조선의 사정을 외국에, 외국의 사정을 조선에 얄려 인민의 지식을 열리게 하며

⑤ 군주, 관료, 백성을 유익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남녀노소와 신분의 상하, 지역의 차별 없이 공평하게 보도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신문사 위치는 어디일까요?
독립신문사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진 이후에도 새 정권은 신문의 필요성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신문 창간에 각종 지원을 해주었으며, 서울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 한옥을 독립신문 사옥으로 빌려줬습니다.


현재 ‘독립신문사 터’임을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얼마 전까지 두 개의 표석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위치에 대한 여러 주장이 존재합니다.


독립신문사터_표석


얼마 전까지는 배제빌딩 뒤쪽에 ‘독립신문사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독립신문의 인쇄소였던 ‘삼문출판사’가 있었던 자리로 전해집니다. 즉, 신문사 편집국과 인쇄소 혼동으로 생긴 오류라고 합니다.


또 다른 표석은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독립신문사는 독일영사관이 자리했던 구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때문에 현재 표석이 위치하고 있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인근, 신아빌딩 바른쪽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설득력 높은 주장으로추정됩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이현희

사진 출처 | 본문 이미지 하단 표기

참고 자료 |

-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강의」

-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83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8416#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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