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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pr 16. 2021

영화<미나리>이전의 미국이민세대, 독립의 한 획을 긋다

우리나라 이민의 역사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원더풀 미나리!” 소리를 절로 나오게 하는 영화 <미나리>를 아시나요?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서로 외에는 희망이 없었던 한국을 뒤로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낯선 미국 땅으로 건너온 한국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37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비롯해 전미 비평가위원회 시상식 등 주요 영화상을 석권했으며, 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후보에 올랐습니다.



다들 이 영화를 보시면서 1980년대 이전의 미국 이주민들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과연 한국인들의 발걸음은 언제부터, 어떻게 미국 땅으로 향하게 된 것일까요?



미국 이민의 시작

미국 이민은 1902년 하와이 설탕재배업자와 대한제국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03~1905년 사이 고종은 수민원(綏民院. immigration office)이라는 이민귀화국을 신설하였습니다. 그렇게 1903년, 첫 이민선인 갤릭호에 몸을 싣고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102명이 첫발을 내디디게 됩니다. 당시 이민을 떠나는 한인들에게는 하와이 이민자 여행권(여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수민원에서 발행한 여행권은 왼쪽에 국한문 혼용으로, 오른쪽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여행권에는 '대한제국(大韓帝國) 해외여행장(海外旅行章)', '수민원총재지장(綏民院總裁之章)'이라는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갤릭호,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 대한제국 해외여행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이후 약 7200명 가량이 이주하였고, 이 중 약 2000여명은 노동기간을 마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탄광이나 은광으로, 일부는 미 서부 중가주의 리들리, 다뉴바 지역의 과일 농장으로 향합니다.


바로 이들이 임시정부의 수립 자금의 핵심이었던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되어, 독립을 위한 자금조성에 큰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이민법의 변화로 시작된 이민자 확대

1924년의 이민법은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하였는데, 아시아인은 그 당시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었고,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는 아시아인들을 배제했습니다.


강용흘 미국시민권 취득 청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이후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미국 이민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에 의하면 미국 시민의 21세 미만의 미혼자녀와 배우자, 부모는 가족의 재결합에 있어서 수적인 제한이 없었고,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이 우선순위가 정해졌습니다.



1) 미국 시민의 21세 이상의 미혼자녀

2) 미국 영주권자의 배우자와 미혼자녀

3) 특출한 능력이 있는 전문가, 과학자와 예술가

4) 미국 시민의 21세 이상의 결혼한 자녀와 그 자녀의 배우자와 자녀들

5) 미국 시민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배우자들

6) 노동력이 부족한 분야의 노동자

7) 정치적 망명자



이 중에 3항과 6항에 있어서는 미국의 노동부에 의한 확인과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 시민과 이민자들은 1965년 이민법을 통해 미국으로 그들의 가족을 데려오기를 기대했고, 1965년 이민법에 의해 아시아계 이민 집단 중에 가장 큰 집단은 3항과 6항의 경우로, 취업 이민자였습니다. 이들 중 영주권자들은 미국에서의 5년의 영주기간이 지난 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었고, 시민권을 얻은 후 그들의 가족을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미나리>에서 모니카(한예리)의 엄마 ‘순자’(윤여정)가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의 집으로 오게 된 것도 이민법 개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탕수수밭의 피땀 묻은 돈, 우리 민족을 연결하다

노동이민자들이 많았던 만큼, 이민 한인들의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사탕수수농장이었습니다. 오하우섬과 빅아일랜드·마우이·카우아이섬 등지의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며 월급은 5센트~15달러 정도였습니다. 돈을 벌어 고국으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인종차별과 노예노동을 견뎠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꿈이 좌절되고 맙니다. 한인 노동자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는 독립운동가들의 뜻에 따라 고달픈 노동의 대가의 상당액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당시의 안재창과 관련된 사진자료들을 통해 한인노동의 환경과 독립운동 관련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안재창은 1903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이민 하였고 1914년 한인소년병학교의 재정자금 지원, 유지단 조직 및 1929년 동지회 디트로이트지회, 1942년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회 등을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활동을 꾸준히 전개한 노동자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안재창 농장에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시민증, 대한민국역사박물관소장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안재창에게 재미한국인증명서를 발행하였습니다. 이 증명서는 1941년 일제의 태평양전쟁 이후 외견상 일본인가 구분되지 않는 재미 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발급되었습니다.


재미한국인증명서 앞.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미주지역의 노동이민자들이 독립자금 조성에 힘썼다는 사실은 1943년, 10월 재무부장 이시영의 발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시영은 임시의정원에 임시정부의 재정상황을 보고하면서 “정부 성립 이래 24년간의 명의를 유지하여 온 것은 완전이 재미교포의 항구 불변하는 성력에서 표현된 것” 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미주한인들이 임시정부의 유지에 가장 큰 힘이 된 지원세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독립자금 관련된 영수증들과 임시정부와의 서신들은 임시정부와 미주한인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임정전환금 영수증.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 차리석이 대한인국민회 최진하에게 보낸 서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938년 6월 14일 임시정부 재무장인 송병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무 최진하에게 보낸 임정재발 제94호 전환금 영수증을 통해 임시정부과 미주 한인들과의 독립금 관련 교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崔鎮河仁兄惠鑒


얼마前에부친편지는아마몬져보셧을줄암니다 오래간만에 新韓民報를받아보니대단히반갑슴니다 (중략) 그리고新韓會館全貌寫眞一枚를보내주시면 이곳 우리 新聞에登載하여同胞에게자랑하려함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하옵는 것은 貴地에서 人力이나財力이나를中國을援助 하려할 때에는 이곧 우리를經由하여送達하면 그援助하는本處의生色은生色대로나고 우리와美洲同胞間에는互相連絡 되는것을알게되겠음니다 이만


弟車利錫

- 차리석이 대한인국민회 최진하에게 보낸 서신



또한 1938년 9월 25일 차리석이 대한인국민회 최진하에게 보낸 서신에는 같은 해 4월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로 새로 이전한 회관, 즉 국민총회관의 사진을 <독립신문>에 등재하기 위해 요청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누락된 <신한민보>를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더불어 미주에서 중국에 원조하려 할 때 임시정부를 경유하면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에 이득이 될 것이며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가 상호연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미국이민이 시작된 1903년부터 독립을 맞이하는 날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기 위한 재정공급처의 역할을 해냈고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명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뿐 만 아니라 대다수는 일반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특정인물 보다는 단체를 중심으로, 한 명 한 명의 참여가 일구어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생활을 견디며 대한독립에 한 획은 그은 지난 날 들의 미국 이민자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미 서부 중가주 지역 리들리 한인 공동묘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사진 출처 | 본문 이미지 하단 표기

자료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자료집 『광복으로 가는 길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자료 https://www.incheon.go.kr/museum/MU040603/

최수경 (2011).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년사 : 평가와 전망. 사회과학연구, 22(1), 15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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