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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pr 20. 2021

일제강점기에는 국악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일제강점기 국악 전승을 위한 교육기관 이야기

여러분 국립국악중·고등학교, 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이 학교들은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의 전승 및 인재 양성을 하고 있는 국립교육기관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음악인 국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을까요? 일제강점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음악이 전승되고 교육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국악의 전승을 위해 설립되었던 다양한 음악교육기관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오늘은 최초의 민간 사설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그리고 기생조합인 권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최초의 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은 1911년에 출범한 “조선정악전습소”입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1909년 9월 15일에 설립된 “조양구락부”가 1911년에 재출범된 것입니다. 조양구락부는 정악의 전수와 연주를 담당했지만, 교육까지 이르지 못하였고, 1911년 조선정악회의 재정적 후원 덕에 이들이 “조선정악전습소”로 재출범되어 최초의 민간음악사설기관이 되었습니다.


조선정악전습소에는 가요부, 음악부, 악기제조부 세 부가 있었고, 그 중 음악부는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가요부와 음악부에는 기성 음악인을 가르치는 이습과와 초보자를 가르치는 교수과로 구분하여 교육했습니다.


1912년에 최초로 배출한 제1회 졸업생은 조선악과 5명, 서양악과 13명이었고, 제2회 졸업생은 조선악과 13명과 <봉선화>, <고향의봄> 등을 작곡한 한국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를 포함하여 서양악과 7명이 졸업했습니다.


조선정악전습소 제2회 졸업생, 홍난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913년에는 입학생이 증가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조선정악전습소의 재정을 후원해오던 정악유지회가 일제 치하에서 문화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이에 후원금이 줄어들며 조선정악전습소의 입학생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916년부터는 초창기의 교사진이 친일단체 ‘교풍회’의 개입으로 조선정악전습소를 떠나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육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워 1935년에 결성된 수요회의 연주활동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해방 이후 조선정악전습소는 한국정악원으로 전승되었습니다.



최초의 왕립음악기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일제강점기 왕립음악기관인 이왕직아악부에는 아악생을 교육시키는 최초의 공립 국악 교육기관인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가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궁중의 의식음악을 담당하던 장악원은 이왕직아악부로 개편되어 전통음악이 명맥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왕직아악부 이전의 장악원은 세습제에 따라 악공이 배출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왕조가 멸망됨과 동시에 궁중음악인들이 세습제에서 해방되며 전통음악의 명맥 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에 1920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장 김영제는 아악생의 수업료와 급료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아악생을 공모하여 중등과정에 해당하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왕직 아악부 제1기 양성생들이 연주하는 모습. 이 사진은 조선의 아악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일본 음악학자 다나베 히사오가 찍은 것이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악부원양성소는 일반 학과목과 실기를 병행해서 배웠습니다. 일반학 과목인 조선어, 일어, 한문, 영어, 습자(習字) 등과 기초악 과목으로는 음악이론, 기악, 성악, 무용, 양악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3학년부터는 전공 악기를 공부했는데, 전공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비파, 젓대, 피리, 해금이 있습니다.



아악부원양성소 소속 아악생의 거문고 교습장면 (이창규 제공)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악부원양성소의 교육을 통해 아악생들은 궁중의 의식음악과 궁중 밖에서 전승되던 풍류방 음악, 또한 한반도에 유입된 서양악을 배웠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중음악이 그 명맥을 이어가며 전승될 수 있었고, 궁중 밖의 음악 또한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제도권의 음악교육기관에서 “정악(正樂)”을 가르쳐 전승될 수 있도록 한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서양악도 함께 배우며 당시의 시대 변화에 맞춰가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광복 이후 국립국악원의 초대 원장 이주환을 비롯한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장사훈, 원로 악사 김천홍 등이 아악부원양성소 출신의 인물들입니다. 이처럼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는 교육을 통해 국악계의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궁중음악을 비롯한 정악이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전승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던 국악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교육기관, 기생조합_권번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약방이나 상방 등에 소속되어 일을 하다가 궁중의 연향에서 노래나 춤을 추던 기생, 즉 관기(官妓)가 있었습니다. 국권을 상실한 후부터 관기제도가 사라지게 되며 기생들이 모여 기생조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은 1918년에 일본식의 “권번”으로 바뀌었습니다.


권번은 기생들에게 전통 공연예술을 가르치던 사설교육기관입니다. 이들은 조선 악기와 성악, 무용을 비롯한 그림 공부, 일어와 같은 교양 과목도 함께 가르쳤습니다.


한일합방 이후에 설립된 대표적인 기생조합으로는 1913년에 설립된 다동조합과 광교조합이 있습니다. 다동조합은 앞서 소개한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 하규일이 향기를 모아 창설한 무부기(정해진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조합으로, 후에 대정권번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또한 동시대에 서울 출신의 경기(京妓)를 중심으로 광교에서 기생조합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광교조합입니다. 이는 다동조합과는 달리 기부를 가진 유부기(남편 격의 기둥서방이 있는 기생을 의미)로 구성된 유부기조합으로, 후에 한성권번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왼)조선권번 예기양성소 | 평양 기생학교 수업 광경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 기생조합의 효시는 1909년에 설립된 한성기생조합소이지만, 다동조합과 광교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기생들이 새로운 기생조합으로 분산되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두 기생조합이 생겨난 이후로 지방의 향기(鄕妓)들로 구성된 평양의 기성권번을 비롯한 신창조합(경화권번), 한남조합(한남권번) 등과 같은 권번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권번의 기생들은 학교가 아닌 사설교육기관에서 다양한 교육을 통해 전통 공연예술을 배우고, 후에 기방에서의 공연활동뿐 아니라 방송국 출연이나 유성기 음반 취입 등의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권번에서 교육을 받은 기생들은 1930년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하는 신민요나 유행가를 뛰어난 기량으로 부르며 대중적인 인기를 차지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권번 기생 사진(노옥화, 윤롱월, 이난향, 이화향)(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늘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전통음악을 가르치던 음악교육기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실의 궁중음악을 전승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새로운 음악문화가 도입되면서 문화예술사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음악기관에서의 전통음악 교육을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그들을 통해 전통음악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올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정체성이자, 역사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우리의 문화가 후대에 올바르게 전승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박명빈

사진 출처 | 본문 이미지 하단 표기

자료 출처 |

<참고문헌>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민속원, 2007.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기생, 권번, 아악부원양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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