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찌하여 이 사람에 관심을 갖게되었나
*이 글은 일단 이훈우를 찾아서 매거진의 글들과 이어진 글입니다. 이 매거진의 글은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로 알려진 이훈우라는 인물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얼마전에 공개된 이훈우의 졸업작품 드로잉('조선 최초 근대건축가의 첫 설계작품 나왔다', 한겨레, 2022년 6월 10일자 보도)과 그가 참여한 초기 건축물들은 전형적인 유럽 고전적 양식, 특히 19세기말 유행하였던 프랑스 제2제정 양식과 영미식 건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의 절충식 공공건물의 양식을 보여준다. 총독부 고원 혹은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의 부산중학교의 경우 어느 정도 이훈우가 참가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상당히 전형적인 19세기 미국식 학교 건물로 보이고 이후의 보성고보와 동덕여학교의 건물에서 일관된 양식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총독부를 나와 사무실을 낸 20 년대에는 상당히 바뀐 스타일을 보여준다. 매일신보 1921년 10월 1일자에 실린 사립 피병원 避病院 의 파사드 도면(1921)과 천도교 대신사출세백주년 기념관(1924)의 모습은 확연히 기존의 고전건축 양식을 벗어나있고, 이를 보고 전형적인 '시세션' 양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혹은 '세제션'이라는 약간 근거가 희막한 발음이나 또는 독일어 발음을 사용하여 '제체션' 양식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분리'를 의미하는 '시세션' Secession 이란 단어는 대략 두개의 대표적인 경향을 의미한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중심으로 보통 1897년 결성된 아방가르드 동맹을 시작으로 하는 19 세기말과 20 세기 초반의 근대 예술·건축 사조이며, 다른 하나는 '분리파' 分離派라고 불리는 1920년 도쿄대 건축학과 출신을 중심으로 시작된 일본의 건축 사조인데 이들은 좀더 엄밀히 말하면 1919 년부터 1933 년까지 존재했던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둘다 이전의 고전적 양식을 타파하고 그로부터 분리된 근대적 양식을 의미한다.
이훈우의 건축 교육은 1908년부터 1911년의 나고야고공에서 이루어졌고, 이후의 총독부 근무를 거쳐 본격 건축 사무실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인데, 미묘하게 일본 분리파와는 기간이 조금 어긋난다. 즉 그가 건축 교육을 받은 기간에는 일본에도 분리파적 건축사조가 도입되기 전이고, 그가 본격 건축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거의 동시 흑은 조금 뒤에 일본의 분리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남아있는 이훈우의 활동 반경을 보면 나고야 고공의 동창회와도 크게 교류가 있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딱히 일본이나 오스트리아의 분리파 운동 참가자들과의 접점 또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면 그의 '분리파적' 요소는 어디서 영향을 받은것일까?
이번 글의 시작은 이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1921년에서 I924년 기간에 아주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이훈우의 천도교 대신사출세백주년기념관과 같은 공간에 먼저 자리잡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21년에 세워졌는데, 이를 설계한 사람은 이미 잘 알려져있듯이 도쿄대 건축학과 출신의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 - 1963)이다.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커리어의 가장 피크 시절에 주로 조선과 만주에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선은행의 주요 지점인 오사카, 다렌, 평톈, 장춘, 군산 지점, 조선식산은행 등이 1920년에서 1923년 사이에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런데 그 활동의 거점이었던 경성의 건축 사무소는 1920년 연말 화재로 전소되고 사무실을 잠시 이전한 그는 1921년 3월부터 1922년 2월 말까지 1년간 구미 여행을 다녀온 후 조선과 다롄에서의 사무실을 철수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1922년 여름부터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건축시장에 다시 재진입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에는 1929년(쇼와전기발전소)과 1936년(이왕가미술관), 이어서 1938년(미쓰이 경성지점, 숙명여전) 각각 다시 건축을 맡기는 하지만 1922년 이후 나카무라는 조선에서 사실상 철수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훈우의 1924년 천도교 기념관 건축은 절묘하게 나카무라의 부재기간에 해당된다. 아, 이때는 아직 박길룡과 경성고공 출신의 건축가들은 총독부의 기사직을 맡고 있었고, 본격적인 조선인 건축가는 이훈우뿐이던 시기이기도 하다(박길통의 개업은 1932년)
나카무라가 구미 여행을 다녀온 1921-22 년 기간에 경성의 나카무라 건축 사무소는 후쿠오카 공업학교 출신의 이와사키 도쿠마쓰(岩崎徳松, 1889-1924)가 맡아있었다. 나카무라가 일본으로 떠나며 사무소를 승계한 이와사키는 조선건축회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하였지만 1923년부터 와병 중에 1924년 세상을 떠나면서 실질적으로 나카무라의 조선과 만주에서의 종료를 하게된다. 천도교의 대신사출세백주년기념관은 이 기간에 결과적으로 더 이상 나카무라 사무소에 가지 않고 이훈우에게 돌아갔다. 이훈우는 이전 대교당 건물을 맡았던 나카무라가 없는 상황, 본인이 천도교인인 점, 그리고, 천도교 교주였던 최린과 일본 유학 및 형들과의 오랜 관계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 기념관의 건축을 맡게된 연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환점이 된 나카무라의 구미 여행에는 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동행자가 있었는데, 현재로서는 1920 년 현재 조선 땅에서 유럽의 분리파적 사조를 체험하였거나 소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고 소개가 되고 있다.
이 글의 주제는 바로 이 서양인 안톤 마르틴 펠러 Anton Martin Feller (1892-1973) 이다. 안톤 마르틴 펠러는 간단히 요약하면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로 1차 대전 참전 후 조선에 머물면서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사무실에서 일하다 그와 구미 여행의 동행자로 다녀온 후 일본으로 가서 안토닌 레이먼드의 사무실에서 옮겨 일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신 이스트 Taliesin East에 합류하였던 사람이다. 한국에는 기본적인 그의 생애가 2007년 김정동의 논문 "라이트와 극동 아시아, 그 연관성에 대하여"와 2013년 김영재의 논문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서양건축양식의 수용과정과 그 의미'을 통해 알려졌다. 그리고, 한국어 논문들은 대부분 그 기본 정보를 공통적으로 일본의 건축사가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泰彦가 1996년에 쓴 "海を渡った日本人建築家-20世紀前半の中国東北地方に おける建築活動" ('바다를 건넌 일본인 건축가 - 20세기 전반의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건축활동', 彰国社, 1996)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논문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으나 대동소이하게 이 책에서 안톤 마르틴 펠러에 대한 정보를 인용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안톤 마르틴 펠러의 생애는 실은 이렇게 누군가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맥락 속에서만 부분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 그런데 비해서 이 논문들은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건축 양식의 변화 혹은 조선의 식민지 초기 근대 건축에 미친 안톤 마르틴 펠러의 영향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톤 마르틴 펠러의 영향에 대한 한국에서의 현재 평가는 대단히 높아서 예를 들어 문화재청에서 2009년 실시한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기록화 조사 보고서에서도 그에 대해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건물의 설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안톤 펠러(Anton Feller)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건축양식이 독일 등 유럽에서 유행하던 근대 분리파(Secession) 양식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안톤 펠러는 1917년에 나카무라 설계사무소에 입소하여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는데 안톤 펠러의 입소 후 나카무라 설계사무소에서 설계한 건축물들은 화려했던 서양 고전풍에서 벗어나 장식이 절제된 스타일로 변화 되었다는 사실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라고 할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 이후의 삶에서 근대 건축의 레전드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연관이 되어서 더더욱 뭔가 동아시아와 세계적 건축을 이어준 매개처럼 언급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평가에 비해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단편적인 사실과 추정, 그리고 그나마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연관이 있어 보였던 1920년대로 끝이 난다. 실제 그는 1973년에 사망을 했으니 이후 50년간의 행적은 현재까지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못하고 말았다.
기본적으로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와 그의 책을 인용한 한국 논문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약력을 종합 정리하고 배경을 조금 설명하고 여기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이후의 삶은 내가 조사하여 발견한 단편적인 자료를 좀 더하여서 안톤 마르틴 펠러의 일차적인 자료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아직 자료를 더 찾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이라도 자료가 좀더 발견되면 좋겠고, 또 그런 과정 속에서 혹시라도 그의 조선에서의 활동이 이훈우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었을지 가능성도 조심스레 한번 모색해보려고 한다. 운이 따라준다면!
사진 출처:
1. 표지 사진: 1920년 안톤 마르틴 펠러가 설계를 담당한 요령성 카이위안(開原) 공회당, 中村與資平作品写真集
2. 3개 학교, 피병원, 천도교 대신사출세백주년 기념관: '건축가 이훈우에 대한 연구', 김현경, 유대혁, 황두진, 한국건축역사학회, 2020
3. 비엔나 시세션 빌딩: 글쓴이 촬영, 2022
4. 分離派建築会 宣言と作品의 표지: 위키백과 分離派建築会 - Wikipedia
5. 안톤 마르틴 펠러의 1923년 사진: Southern California Architectural History: The Taliesin Class of 1924: A Case Study in Publicity and Fame (socalarchhistory.blogspot.com) by John Crosse
참고 자료
1.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에 대하여
2. 이와사키 도쿠마쓰(岩崎徳松)에 대하여
福岡工業学校 教師・卒業生 列伝|明治の工業学校に生きた人々 (fis-legend.online)
3. '라이트와 극동 아시아, 그 연관성에 대하여', 김정동, 한국건축역사학회, 2007
4.'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서양건축양식의 수용과정과 그 의미', 김영재, 2013, 대한건축학회
5. '海を渡った日本人建築家-20世紀前半の中国東北地方に おける建築活動', 西澤泰彦 , 彰国社, 1996)
6.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