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늦은 저녁 시간에 전화가 왔다.
지점이 여덟 군데나 되는 대형 학원을 운영하는 대표라고 했다.
나는 최근 초등 애들과 글도 쓰고, 토론도 하고 싶어서 학원가에 이력서를 올려놓았다. 짧게 자기소개서를 써서 올리긴 했지만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아직 생각만 하는 상황이라 지원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웠다. 이 대표는 강사 자리를 제안하다가 내가 거리가 멀어 어렵겠다고 하자, 교재 편집 얘기를 했다. 어느 쪽이든 만나서 더 얘기를 하고 싶다고. 교재 편집은 해본 적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그래도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안 만날 이유가 없었다.
'교재 편집도 시켜주면 할 수 있지. 안 해본 것도 해보기로 했잖아.'
다음 날 카페에서 만났다. 대표는 약속 시간에 좀 늦었는데, 사실 나는 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몇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 어떤 경력을 보고 일을 맡긴다는 거지?'
'스카이도 아닌 학벌? 학원 교재와는 상관없는 출판사 경력? A4 한 장도 안 되는 자기소개서?'
대표는 배고프지 않냐며 케이크를 두 조각 사 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어떤 일을 어떻게 맡길 것인지 궁금해하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그의 사생활 얘기가 시작됐다.
자신이 국문과에 지원한 이유, 학창 시절 집안 사정, 현재 집안 사정, 시를 쓰고 싶었던 젊은 날, 학교 교사 생활, 사표를 내고 학원으로 전향해 보낸 세월, 뒤늦게 다니게 된 대학원 체험기.... 이 정도는 서두에 불과했다. 내가 졸업한 대학에서 그 대표가 겪은 일, 좋아하는 시인과 작품론,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의 시작부터 비전까지... 나는 지난날 인터뷰할 때 만난 사람들 중에 요점 없이 말해서 괴로웠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일이다, 생각하고 최대한 참으며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실로 방대한 자서전 같은 이야기였다. 내 몸이 마치 거대한 귀로 변하는 듯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세 시간 대화의 지분은 90%가 그에게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가 아니면서도 막역한 후배처럼 대하며 학원의 미래에 함께해 달라 했다. 함께하는 멤버들이 나와 성향이 맞을 것이며, 지금 멤버들 사이에 나 같은 성격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교재 개발과 편집이 학원 일 중에 얼마나 중요한지, 앞으로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지 사업적 구상도 공유했다. 내가 도대체 뭘 보고 날 뽑으려는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15년 업력으로 촉이 왔다고 했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세계관도 알 수 있지 않느냐며. 내 자기소개서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국문과에는 여러 부류가 있는데 나는 '착한 과'라고.
강사 일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니, 그런 일자리는 찾지 말고 교재일을 같이 하자고.
그런데 이 대표와 어떤 계약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일을 열어 보니 황당하게도 "초저가 알바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거절하고 난 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몰래카메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쓴 자기소개서 글이 건드리면 안 되는 그의 어떤 추억을 건드렸나? 아니면 무알콜 술주정인가.'
살다 보면 감상에 젖어 자기 이야기를 좀 길게 할 수 있다. 초면에 필터 없이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실제 그런 경험을 몇 번 했다. 그분들은 초면인 내게 마음을 열고 자기 얘기를 해주었다. 때론 인터뷰 자리였고, 때론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랬다.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들을 기억할 정도로 그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마음을 여는 것만큼 사람 사이에 고마운 일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면접 보자고 불러내서 그러지는 말았으면 한다.
"진짜 그르지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