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프라하가 슬퍼요
블타바 강도 슬프고 프라하성도 다 슬퍼요
.....
아이는 향수병에 사 달리고 았었다
유학 5년 차
프라하 음악원에 6년 전액 국비장학금으로 입학했다고 기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어느새 귀국을 향하여 가까워오고 았었다
프라하에 와서 1년은 까를대에서 체코어를 공부 헌다고 보냈고 프라하 음악원에서는 4년 차..
아직 졸업하려면 2년을 더해야 하는데 아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매년 여름 잘쯔를 오가며 들렀을 때 전혀 느끼지 못하던 어려움이었다. 까렐대에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외국어대 형 누나들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까렐대 의대에 남아 있던 친한 누나와 형도 갑자기 학교 측으로부터 졸업을 시켜줄 수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혼자 프라하 음악원에 남게 되었다. 졸업을 1년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 축의 통보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례는 남아있는 재림이에게는 큰 충격이자 힘 빠지는 일이었다. 사립은 학비가 너무 비싸고 국립은 정말 힘들게 들어가도 체코어로 모든 학점을 다 받아야 해서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체코어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프라하 음악원에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걸 모르고 간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양인으로서 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이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같이 공부하던 일본의 학생들은 이미 동경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온지라 그곳에서 음악활동을 하며 느긋하게 공부해도 되었지만 똑같은 콘 서리 바토리에서 학 석사 과정을 마쳐야 하는 재림이에게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특히 음악 관련 실기나 이론과목 외에 체코 문학이나 역사를 체코어로 공부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전공 관련 과목들과 실기는 늘 우수한 성적인데 체코 역사나 문학은 겨우 F학점을 면할 정도였다. 그래서 몇 번 담당 과목 교수님들께 호출을 받고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애초에 유학을 갈 때 잘츠부르크 모짤테움 음대와 프라하 음악원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때 모짤테움을 갔으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는 6년 전액 장학금에 끌려 프라하움악원을 선택했다.
빈과 잘쯔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많아 정보도 많았지만 프라하 음악원은 정보가 거의 없어 학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올려놓은 공지와 정보를 읽다가 학교 측과 연락되었다. 한 시간 자리 연주 동영상을 만들어 학교에 제출하면 10분의 교수님들이 심사해서 통과되면 다시 학교에서 실기시험을 한번 더 치고 최종 합격 여부를 통보해 준다고 했다.
예고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아이는 문화회관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한 시간짜리 연주에서 드브르작 전 악장을 연주했다 그 연주 동영상을 들고 아이는 유학길에 올랐다. 심사기간이 한 달 정도 걸리니 먼저 들어와서 체코어를 공부하면 좋겠다고 해서 입학도 미지수인 프라하 음악원을 향해 떠난 것이다.
프라하 6구역에 집을 얻고 까렐데 우욥에서 체코어 공부를 시작했다. 입학이 결정되기까지 나도 마침 겨울방학이라 함께 가서 체코어 단기과정을 등록했다. 둘이서 매일 아침 7시면 학교에 가기 위해 마을버스와 트램을 두 번 갈아타고 2구역에 있는 까렐대 우욥에 갔다. 재림이는 1년 정규과정 나는 2달 단기과정이라 공부는 서로 다른 곳에서 했다.
내가 하는 두 달 단기과정은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석여 있었고 재림이가 다니는 반은 대부분 한국 외국어대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었다. 재림이반은 기초과정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는데 내가 다니는 반은 이미 체코에 살면서 두 달짜리 단기과정을 되풀이해서 몇 번씩 듣는 성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수준도 제각각이라 체코어가 완전 초보인 나는 처음에 많이 당황했다. 한국에서는 나도 선생님인데 체코어 교실에서는 완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바보가 되었다. 그래서 두 달간 다니며 설움도 많았고 에피소드도 많았다.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까렐대에서 언어를 공부하며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그런데 아직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시험을 치러 오라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우린 매일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우체통을 들여다보았지만 야속하게 우리에게 온 편지는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주인 댁 마르틴 교수님과 상담을 했다.
두 분 다 국립대 교수님이라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학교 측에 알아봐 주시겠다고 했다.
두 분이 하루 시간을 내어 우린 함께 프라하 음악원을 갔다. 마르틴 교수님의 친구분이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님이라 그분이 학교 행정실에 여러 가지를 알아봐 주셨다. 우린 덕분에 처음으로 프라하 음악원 내부를 구석구석 볼 수 있었다. 한나절이 다 되어서야 우린 왜 아무런 연락이 없는지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10분의 교수님 중 한 분이 아직 동영상 심사를 통과시켜 주지 않아서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주 까지만 기다리면 다음 주에는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우린 집으로 왔다. 바쁜 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그날 점심식사도 사주셨다. 부인인 레나타 교수님은 자기들도 자녀 셋을 다 예술가로 키워 그 고충이 얼마나 큰지 안다며 나를 위로하셨다.
그 다음 주 우린 드디어 프라하 음악원으로부터 입학시험을 치러 오라고 연락을 받았다. 동영상에서 연주했던 곡들 중 일부를 심사위원 앞에서 다시 연주해야 했다. 스케일과 드보르작, 로코코 변주곡을 다시 연주한 아이는 너무 떨려 어떻게 연주했는지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으니 이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편안한 맘으로 체코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만약 떨어지면 한국의 대학도 합격하고 왔으니 돌아가면 된다고 말했더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펄적 뛴다.
아이는 유럽의 체계화된 음악공부를 꼭 하고 싶어 했다. 중 3 때 급하게 예고를 가기로 결정하고 맨날 수준에 맞지 않는 입시곡만 연습하다가 예고에 간 아이는 자신에게 기본기가 너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처음 아이가 첼로를 전공하겠노라고 했을 때 난 1년을 반대하며 아이와 대치했다. 내가 첼로를 전공하고 음악의 길을 가고 있어도 아들이 막상 첼로를 전공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공부도 잘하는데 의대나 공대를 갔으면 좋겠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취미로 시킨 첼로를 전공을 하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초등학교 4학년 처음 첼로를 시켰을 때 아이를 가르치셨던 첼로 교수님은 내 은사님이기도 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아이를 첼로 전공을 시키면 어떻게냐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아이가 첼로를 하기에 좋은 몸 구조를 가졌고 재능도 있다며 권하셨지만 난 딱 잘라 전공은 안된다고 말씀드렸다. 남자아이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음악을 전공한다는 게 그때는 너무 먼 가시밭길 같았다.
그래서 중 2 때까지는 정말 아이는 딱 취미로만 재미있게 첼로를 배웠다. 그 와중에도 매년 내 제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문화회관 무대에 설 때면 아이도 거기에 끼어 같이 연주를 허곤 했다.
그런데 그 연주가 매년 쌓여가면서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대의 굼을 키워가고 있었다. 어쩌면 중학교 때부터 교회 반주를 하며 매주 그 작은 무대를 즐기던 엄마의 어떠함을 아이도 꼭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무대에만 서면 유독 에너지가 넘쳤다. 매년 연주회를 하며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도 나는 취미로 하는 거니 기특하다는 생각 외에는 전공을 시킬 마음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2 때 예고를 가겠다고 선포를 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절대로 전공은 안된다고 반대하며 일 년 가까이 서로 대치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아이는 다른 애들은 다 음악을 하라고 격려하면서 자기는 왜 안되는지 강하게 반발했다.. 나는 전공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남자가 음악을 전공하면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얘기하며 아빠처럼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강요했다.
시간이 지나면 고집을 꺾을 줄 알았던 아이는 점점 더 반항하기 시작했고 나에게 까칠함의 극도를 보이며 거리를 두었다. 반에서 1 2등을 하던 아이는 점점 공부를 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끝에서 10위안에 들게 되었다. 학원도 보내보고 으름장도 놓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아이가 백지 시험을 냈다는 거였다. 그날 너무나 화가 나서 학교에서 돌아오며 차 안에서 아이와 대판 싸웠다.
왜 꼭 첼로를 전공해야 하냐고 아이를 다그쳤다. 의대나 공대를 가서 첼로는 취미로 하면 되지 않냐고 아이를 몰아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그때는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게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그날 아이는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려 벽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골목길이라 천천히 운전하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가 뛰어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너무 놀라 차를 세우고 벽에다 머리를 박고 울고 있는 아이 앞에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이제 내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이를 안고 진정시켰다. 엄마가 정말 잘못했노라고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는 둘이서 함께 울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아이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선물로 보내주셨는데 아이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아이의 장래를 정하고 있는 나를 보며 진심으로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날 범 아이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지나 온 시간을 정리하고 앞으로 가게 될 새로운 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에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기로 했다 그일 이후 아이와 나는 좋은 음악적 동반자가 되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가게 된 첼로 전공...
그 과정에서 아이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우린 항상 서로 얘기하며 함께 헤쳐나갔다. 중 2 때 까지는 까칠함의 극치였던 아이는 예고 3년을 다니며 항상 함께 얘기하고 고민을 나누었다.
주위에서 딸 같은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우린 뒤늦게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이 길을 함께 갔다. 교회에서도 내가 피아노를 치면 아이는 첼로를 연주했다.
그렇게 예고 3년을 같이 보낸 아이가 유학을 결심했을 때 난 겁도 없이 아이를 보내기로 했다. 첼로 전공을 선택한 아이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감당하며 가겠노라고 얘기했다.
예고 2학년 때 아이는 첫 시련을 겪었다. 중3 그것도 2학기가 다 되어서 엄마의 반대로 뒤늦게 전공을 결정한 아이는 3개월 입시곡만 연습하다가 겨우 입학을 했다. 어릴 때부터 전공을 결정하고 체계적인 레슨을 받던 아이들과 달리 아이는 취미로 스즈끼와 좋아하는 곡들만 하다가 입시곡 하나를 겨우해서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다른 친구들과의 수준 차이는 하루아침에 좁혀지지 않았다
기본 베이스가 부족한 상태에서 학교에서 하는 각종 연주와 오케스트라 수업을 따라가기가 너무 역부족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쉽게 하는 연주곡들이 초견 훈련이 부족한 아이에겐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수준에 맞지 않는 높은 곡들로 매번 실기시험을 쳐야 하는 아이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자 예고에 다니는 것을 고민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경쟁도 스트레스였던 아이는 점점 말수가 적어지더니 2학년이 되자 심각하게 다시 일반고로 전학을 갈 것을 고민했다. 아이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줄 몰랐다
고2 여름방학 때 나는 아이를 유럽의 음악캠프에 데리고 갔다. 여름 한 달 동안 유럽의 선생님께 레슨을 받아보고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 했다. 한 달간 프라하에서 아이는 거의 매일 레슨 받고 연습에 매달렸다. 아이를 레슨 하신 교수님은 아이가 준비해 간 곡들은 하나도 안 시키고 스케일과 연습곡들만 시키셨다. 수준 높은 곡들을 할 수 있는 베이스가 전혀 없다는 거였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듯 손가락을 돌려 곡들을 연주는 하지만 전혀 그 곡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흉내만 내고 있다고 하셨다
처음에 아이는 가지고 간 실기 곡들을 못하는 것에 속상해했지만 시간이 가며 매일 기본기 연습을 시키는 교수님의 의도를 잘 따라가 주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보내고 한국으로 온 아이는 조금씩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실기 등수를 2명이나 앞질러 버렸다 고3 여름에 아이는 잘쯔 모짤테움 음대 캠프에 다시 합류해서 또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이번엔 활 쓰기의 기본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매일 강도 높은 연습곡들을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여름 한 달 잘쯔에서 아이는 학교 연습실에서만 살았다.
레슨 시간외에는 연습실에 틀어박혀 매일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를 연습한다고 유럽에 와서도 같이 인근 나라를 여행 한번 못했다.
그렇게 우럽의 움악수업을 경험한 아이는 예고 마지막 학기 때는 학교 선생님들을 돌아가며 놀라게 했다 음악 이론 과목뿐 아니라 일반 과목들도 만점 행진을 돌아가면서 하더니 드다어 전공실기에서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첼로 실기 1등을 하던 학생의 지도강사남은 아이의 연주를 보며 이제 저 아이가 너희들 다 앞지르겠다며 다른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아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특히 항상 부족함을 지적하시던 연주 수업 담당 선생님께서 아이를 개인적으로 따로 불러 연주 실기가 너무 많이 향상되었다고 격려해 주셔서 아이는 고3 마지막 학기에 드디어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시를 준비해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아이는 유학을 가고 싶어 했다. 대학을 가도 기본 베이스를 더 쌓기에는 교육 사스템이 실기 곡들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현실이라 이제 막 만들기 시작한 음악의 기초체력을 더 탄탄하게 만들기 원했다.
그렇게 해서 떠난 프라하 유학
5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았다.
일상생활과 전공수업을 하는 데는 체코어가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체코 역사나 문학을 체코어로 공부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애초 입학할 때 실기시험 뿐 아니라 체코어로 음악사나 전공 관련 과목들을 인터뷰하며 다 합격한지라 체코어가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교수님이 체코어를 하면 그걸 영어로 번역해서 공부했던 아이에게 체코 역사나 문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자국민도 잘 입학시켜주지 않는 프라하 음악원에서 6년 국비장학금을 받는 외국인 학생에게 학교 측의 성적 요구는 냉정했다.
강의시간 외에는 매일 연습에만 매달리느라 유럽에 살면서 여행 한 번도 못해보고 첼로와 보낸 세월이었다. 전공실기는 과에서 일등을 할 정도로 인정 받았지만 그놈의 체코어가 아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체코 전체 콘서리바트리 음악 경연에서 프라하 음악원의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서 그 공연을 위해 담당교수님으로부터 초정을 받고 프라하에 가게 되었는데 아이의 내면은 힘든 과정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