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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희 Apr 07. 2021

무모한 질주

 갯새암 < 내 어머니의 샘>>


속이 너무 쓰려 ‘밥 따로 물 따로’ 식사법을 내려놓고 난 다시 현미채식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이시하라 유미 박사님의 사과·당근주스, 서재걸 박사님의 해독주스, 또 간헐적 단식까지 추가하며 다이어트를 열심히 했지만 더 이상 살은 빠지지 않고 꾸준히 몸무게가 증가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커피도 못 마시고 남들처럼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닌데 체중은 꾸준히 늘어 갔고, 정말 힘들게 1㎏을 빼도 하루가 지나면 다시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가 있었다. 점점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희한하게 남들에게 다 좋다는 요법들이 내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사과·당근주스는 너무 맛있어서 한동안 아침마다 계속 갈아 마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날부터 주스를 마시면 뒷골이 당겨 왔다. 그리고 해독주스는 마시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불량 증상이 나타났다. 간헐적 단식은 공복감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고 폭식을 유발했다. 또 현미밥에 야채 쌈을 싸 먹으면 방광염에 걸린 것처럼 소변을 볼 때 통증이 있었다.


일단 식사를 안 하면 그 증세는 해결됐지만 왜 현미채식을 하는데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푸른 변을 보기 시작했다. 변비는 아닌데 자주 설사나 푸른 변을 봐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겨울방학 때 학생들과 제주도로 음악캠프를 가게 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 저녁식사 후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과 함께 소변이 또 안 나오기 시작했다.


호텔 방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몇 시간이 지나서 좀 안정이 되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제주도의 한 단식원에 들어갔다. 일단 몸을 좀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식원에서 3일 정도 절식하며 쉬었더니 몸이 좀 안정이 되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제주도에서 혼자 아프다가 캠프 일정도 소화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참 마음이 무거웠다. 부산으로 돌아와 백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소변 검사를 하니 소변이 짙은 갈색을 띠고 피까지 섞여 나왔다.    

      

며칠 후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간수치가 너무 높으니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가니 피검사를 다시 해 보자고 하셨다. 피검사 결과 수치는 다시 떨어졌지만 과거 병원 진료기록을 보더니 담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CT를 찍어 보자고 했다. 제주도에서의 일을 얘기했더니 아마 담석이 빠져나오면서 느끼는 통증이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CT를 바로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과거에 생긴 담석이 빠져나오면서 생긴 통증이라고 해서 난 솔직히 CT 비용이 너무 아까워 예약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이후에도 소변을 보는 일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식사를 제한하면 괜찮아져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러나 소화불량을 동반한 옆구리 통증은 점차 그 빈도가 높아졌다.


늘 배가 아프고 소화제를 달고 살았으며 한 번씩 아플 때마다 2시간 가까이 웅크리고 앉아 고통을 견뎌야 했다. 과거에 수지침을 놓아 다른 사람들을 치료해 주던 내가 이제는 웰빙 음식에 자연 채식을 먹고 있지만 몸은 나날이 종합병원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또 여름방학이 돌아왔다.     

     

제주도에서 못다 한 캠프를 아쉬워하며 재림이와 함께 유럽에 갔다. 재림이가 프라하에서 귀국하고 2년 만이었다. 잘츠부르크에 3주간 머무르면서 여름 음악캠프에 참석하고 그 사이 스위스를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은 현미채식을 할 수 없어 매일 치즈와 오이, 토마토를 먹었다. 그리고 마트에서 바로 짜 주는 신선한 오렌지주스를 자주 마셨다. 이왕 현미채식을 못하는 김에 원 없이 원두커피를 마셨고 고기도 한 번씩 먹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으면 중국인 상점에 가서 쌀을 사 와 밥을 지었다. 신선한 야채에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달걀프라이와 함께 비벼 먹으면 입맛이 돌았다. 그리고 한국에선 전혀 먹지 않던 라면도 가끔씩 끓여 먹었다.     

     

캠프를 마치고 비엔나를 거쳐 프라하에 가서 한 달을 채운 다음 한국으로 돌아왔다. 프라하에선 치즈와 커피, 빵을 주로 먹었고 야채와 과일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프라하성에 출근해 성을 한 바퀴 돌고, 남는 시간에는 트램을 타고 프라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아마 하루에 서너 시간은 꼭 걸어 다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은 거의 빠지지 않았지만….       

   

신기한 건 유럽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일 고지방식인 치즈를 먹었는데도 아프지 않은 건 기적이었다. 마음이 편해서였을까?

여행 내내 고기와 치즈를 엄청나게 먹었는데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고 옆구리 통증도 없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잘 보냈고, 문제는 한국에 와서 터졌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유럽에서는 아프지 않던 배가 또다시 아파 왔고 그 빈도가 잦아졌다. 2학기 시작되고 며칠을 복통으로 고생하다가, 하루는 퇴근길에 거의 죽을 만큼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보통 2시간이면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았는데, 그날은 6시간이 지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되자 ‘이제 드디어 죽는구나!’ 싶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대구에 있는 재림이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지금 너무 아파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으니 부산으로 좀 내려오라고 했다. 애가 얼마나 놀랐던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울었다고 한다. 너무 아파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새벽 두 시에 가까이 사는 교회의 성도님 가정에 전화를 했다. 실례인 줄 알지만 거의 죽기 직전이라 경황이 없었다. 놀라서 달려오신 형제님 가정과 백병원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에서 몇 가지 문진을 한 후 곧바로 CT를 찍었다. 복통은 계속 이어지다가 주사와 링거를 맞으면서 조금씩 진정되었다. 새벽녘, 담당 의사가 오더니 담낭에 돌이 꽉 찼고 그중에 하나가 빠져나와 담도관을 막고 있다고 했다. 응급 수술로 담도관에 박힌 돌을 먼저 제거하고, 나중에 담낭을 아예 제거하자고 했다. 수술로 응급상황을 넘겼다고 해도, 언제 다시 꽉 찬 담낭에서 돌이 빠져나올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난 불안한 눈으로 의사에게 꼭 담낭을 제거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냥 돌이 빠져나오도록 할 수는 없는지 궁금했다. 의사는 돌이 한두 개가 아니라 담낭 안에 꽉 차 있어서 제거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다고 말했다. 도대체 내 몸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누워 있는데 응급실의 풍경은 나를 더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즈음 부산대학교 병원과 울산대학교 병원이 노조 파업으로 진료를 하지 않아 백병원으로 환자가 끊임없이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앓는 소리, 기침 소리, 울음소리에 잠시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내과 주치의는 병원 규정상 병실이 나야 수술을 할 수 있는데, 병원에 환자가 넘쳐 병실이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수술도, 1차 수술 후 간수치가 떨어져야 2차 담낭 제거 수술도 할 수 있어서 최소한 열흘 이상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좀 괜찮으니 학교에 가서 조치를 취하고 병실이 나면 다시 입원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담당의사는 자기도 환자가 넘쳐 힘들지만 지금 환자 분 상태가 너무 심각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12시간 안에 담도관에 박힌 돌을 제거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기에 응급실에 계속 있더라도 무조건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졸지에 아무런 준비 없이 병원에 들어와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새벽에 대구에서 내려온 재림이에게 집에 가서 입원 용품을 챙겨 오라고 부탁했다. 학교에도 전화해서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임 선생님께 뒷일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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