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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개미핥기 Jan 31. 2022

� 나는 어떤 사람인가?

✔️ 매일마다는 어렵고, 매주 내가 만든 자료들 통계를 살펴보며 내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 과거부터 그랬다. 특출 나게 무엇을 잘하기보다는 '꾸준히', '독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머리가 뛰어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과거 교육이 강조하던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단지, 나는 '꾸준히' 할 뿐이었다.


✔️ 또한, 좋아하는 것을 할 뿐이었다. 대학교 입학까지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좋아서 국문과에 입학했다. 한때는 문학작품을 쓰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이내 곧 포기했는데, 글을 쓸 때마다 밋밋한 감성만이 글 속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높낮이가 없고, 하이라이트가 없다. 일정한 선을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 절벽 위에 걸쳐진 외줄타기 느낌을 주는 남의 글과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포기했다.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그냥도 아니고 절실히 들었기에.


✔️ 대학교 1학년 1학기 말, 학술적 글쓰기와 마주했다. 어렵고, 지루했고,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연구하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사실, 남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경쟁한다는 그 환경이 좋았다.


✔️ 그 환경에 매몰되다 보니 어느덧 10년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만의 연구주제를 파기 시작했고, 타 대학교를 다니며 스터디를 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에 가는 것이 당연해졌고, 처음 목표는 서울대 대학원이었다. 하지만 내 역량이 부족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영역과 달랐다. 영역이 다르다는 것은 학교별로 추구하는 방법론의 차이였다.


✔️ 전통적인 방법론을 연구하는 곳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나와 결이 달랐다. 들어가도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중에 지도교수님이 계신 곳을 알았고, 그곳을 목표로 공부했다. 생각과 다르게 한 번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 보면 보잘것없는 연구계획서를 좋게 봐주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안 계신 고전문학 교수님이셨다.


✔️ 그 덕분에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없는 능력 쥐어 짜내어 석사 논문을 써낼 수 있었다. 그 당시도 꾸준히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동기들은 모두 석사를 땄지만, 앞 뒤 1기수 중 대다수는 이탈했다. 사실 석사논문은 꾸준히 하면 취득 가능한 학위라 생각한다. 박사는 아니지만.


✔️ 현생에 치어, 힘든 환경에 놓여, 어려움에 막혀, 관두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한 예로 내 뒷 기수는 8명이 들어와 2명만이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니까 말이다.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을 쉽게 주지 않는 것이다. 예전과 다르게 대학원은 돈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돈 없는 사람들이 '진짜 공부하고 싶어서'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 나 또한, 어머니 공장에 가 일을 도우며 밤새 발제문을 작성했었다. 그탓에 수많은 결점과 결함, 부족함이 잔뜩 들어있었고, 깨지기도 많이 깨졌다. 대학교 2학년도 안 되는 수준의 글이라는 말도 들었고, 이렇게 하면 석사학위도 취득하지 못할 거란 말을 들었다.


✔️ 그때 어머니 공장일 돕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24시간 공부에만 몰두해도 부족한 내게, 더 이상 시간의 누수를 만들면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 어려운 결정이었다. 어머니 혼자 운영하는 공장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어머니의 노동력을 더 착취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 같았다. '난독증'이 있는 내가, 힘들게 책을 읽으며, 공장 일을 하며,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대신, 집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보다는 학교에서 재화를 얻는 방식을 택했다. 원래 어머니로부터 지원을 잘 받지 않았지만, 그것을 더 줄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 그 결정과 동시에 국문과에서 동아시아학과로 전과했다. 당시 BK 사업 지원자에 속하려면 그게 수월했다. 또한, 조교와 같은 일자리가 있었다. 그렇게 학업과 조교 등 돈 되는 일을 병행하며, 세미나실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는 3개월 간 학교 세미나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 처음에 3개월 전부터 준비한다고 하니, 선배들은 빨리 지치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3개월은 준비해야 하나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 교통비도 줄일 수 있었다. 식비도 줄었다. 학식으로 해결하면 됐기 때문이다.


✔️ 3개월을 꼬박 논문만 준비하여, 겨우 통과했다. 근데 이 통과도 불쌍해서 통과시켜 준 느낌이다.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새로운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기록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얕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논문 주제에 대해 후회한다. 너무 부족한 내 역량으로 좋은 주제를 건드려서이다. 


✔️ 이 주제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떠올리며 정했다. 아버지는 1970~80년대 중동건설노동자로 지내다 오셨다. 이 주제는 아버지가 그리워서 정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내 주변 삼촌들이 어떠한 사람이 살았는지 궁금해서 정했다. 


✔️ 그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했고, 열심히 파냈다. 부족한 자료들 모두를 뒤져가며,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니며, 논문 자료를 취합했다. 자료 복사에만 몇 날 며칠을 보냈다.


✔️ 그래도 있는 거 없는 거 다 모아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분량은 채워졌다. 다만 앞서 말했듯 내용은 너무나도 부족해, 나를 거쳐간 순간 그 주제의 질이 떨어져 버렸다. 그에 대한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소중한 분들이 나로 인해 존재감 자체가 흐려진 것이 아닐까 해서다. 


✔️ 한편으론 감사하다. 내게 그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이라서, '서발턴'이라는 세상의 '非주류'를 연구하고자 했던 내 마음가짐을 다 잡아주신 분들이라서. 여전히 나는 '非주류'를 'Be주류'화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래야 세상 곳곳에 숨겨진 것들을 표면으로 드러낼 수 있으니까, 나라도 그에 대해 공헌할 수 있으니까.


✔️ 하지만 너무 걱정이다. 부족한 내 능력으로 그것들을 파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릴까 봐.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꾸준히, 더 꾸준히 노력할 뿐이다. 오늘의 목표가, 이번 주의 목표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그리며, 과거를 기리며, 상승 곡선을 탈 수 있도록 시원한 바람으로 작동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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