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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 인생은 길 잃음의 연속이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 미래의 자신을 잘 받아줘라.
✔️ 저도 다가올 10월에 두 후배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기로 했어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는 중인데요. 적어도 딱딱한 말을 하지 말자, 인생의 선배로서 꼰대같은 말만 하지 말자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게 참 어렵더라고요.
✔️ 그러다 마주한 허준이 교수의 축사는, 딱딱하지도, 꼰대스럽지도 않은 내용들이 들어있더라고요. 그 중 가장 눈에 띈 부분은 '인생은 길 잃음의 연속'이며, 실패했다고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었어요. 또한, 자신을 가장 잘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네요.
✔️ 저도 14년 동안 '길 잃음'의 연속이었어요. 아니,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포함한다면 20년 정도려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항상 찾아다녔고, 푹 빠졌지만 내 것이 아님을 눈치채고 포기하길 몇 번, 아직도 저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 허준이 교수의 축사처럼 30,000일 중, 저는 아직 반도 못 살았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도전할 거리도 많고, 시도할 거리도 많고, 책임져야 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놓여있네요. 당장 앞에 놓인 과제도 있지만, 10월에 있을 결혼식 축사조차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라 조금 막막하지만, 그 자체를 즐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요.
✔️ 즐긴다는 것은 앞으로도 '길을 잃겠다'는 제 포부와도 같은데요. 기존에 놓여있던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기 보단, 조금은 방향을 틀어 '새로움'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나 싶어요. 이 새로움은 '나'라는 자신을 믿었을 때 도출되는 것인데, 그의 말처럼 '나에게 친절'해야 할 수 있는 행위에요.
✔️ 저는 추가로 주변 지인을 믿고,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요. 현재의 나 자신을 만들었고, 미래의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없다면 아마도 저는 미숙했을 것이고, 미숙하고, 미숙할 테니까요.
✔️ 제가 좋아하는 말 하나가 있어요. 제 모토이기도 한데요. '나는 내 삶에서 만난 사람들의 총체다.' 전 머니투데이 기자였던 고 김승미씨의 명함에 있던 말이에요. 그분을 기리며 쓴 추도사를 마주하고, 가슴에 강하게 박혀 소중하게 간직하게 된 문장인데, 어쩌다보니 인생 목표가 됐네요.
✔️ 이 문장을 보며 또 다른 사람도 떠올랐어요. 제 대학교 은사님인 김택호 교수님인데요. 선생님은 항상 '나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앞 문장과 조화시키면 '내가 앞으로 더 잘 살지 않을까'싶었어요. 그래서 이 두 문장을 항상 가슴에 새기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아, 선생님한테는 아직도 연락하며, 가끔 밥도 얻어먹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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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전문이에요. (22.08.29)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 천 일, 혹은 다가올 몇 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