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와 채움, 나를 살려내는 일
허무와 충만
바람이 한풀 꺾인 것 같다. 올해 여름은 지독하게 더웠다. 입추가 지나니 좀 살 것 같다. 엊저녁엔 풀벌레 소리가 가까웠다. 밤엔 서늘한 기운에 이불깃을 슬며시 당겨 덮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여름도 어느새 기울고 있다.
400매 원고를 마무리하여 감수 보냈다. 휴~, 살 것 같은 안도가 이는 것도 잠시, 묘한 허기가 온다. 350매를 계획했으나 쓰다 보니 분량이 자꾸 늘어났다. 붙잡아야 할 이야기들이 줄을 섰다. 나는 이게 문제다. 지리멸렬한… 그렇게 500매를 훌쩍 넘겼다. 이건 아니다 싶어 찬물 한 모금 먹고 난도질을 시작했다. 쥐어뜯듯 덜어내며 마지막 일주일을 보냈다.
어쨌거나 350매 분량인데 50매 초과다. 감수가 끝나면 분명 내가 보지 못한 과한 부분이 드러날 것이다. 쓰는 동안은 논문과 책을 뒤지고, 기록의 빈틈을 메우며 한 줄 한 줄을 곧추세우느라 애를 썼다. 사실의 얼개를 붙드는 일은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보내고 나니 힘이 풀린 듯 맥없이 처진다.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 오히려 살아있는 시간이고, 가장 나다운 시간인 것 같다.
찾고, 쓰고 줄이고 다듬는 일은 치열한 전투 같으나, 이런 고단함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은근한 충만 뒤에 찾아오는 허무.
며칠만 쉬자 하다가도 또 다른 일의 고삐를 ‘훅’ 당긴다.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
책상에 자료와 책이 쓸모를 잃은 듯 잔뜩 쌓여 있다. 그러나 가만히 둘 내가 아니다. 다시 책을 들춘다. 글을 쓴다는 건 소모와 생성을 동시에 품은 일이고, 나를 갉아먹으면서도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이 소모와 채움의 반복을, 어쩌면 나는 지독하게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버리려던 화분에 꽃은 왜 자꾸 피고 ㅈ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