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좇아

꿈을 향해 달렸다

by 박시윤

무지개를 좇아

저녁답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는 지지 않았지만, 먼 들녘 끝에서 회색빛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왔다. 바람에 비 냄새가 묻어왔다. ‘곧 비가 짜들겠다.’ 기척 없던 하늘이 이내 갈라졌다. 가늘고 예리한 번개가 긋고 얼마 뒤 천둥이 울렸다. 움찔했다. 곧이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모두가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나쁘지 않은 이 반가움.
비는 땅을 충분히 적시지 못했다. 찔끔, 먼지를 눅이는 정도였다. 바로 그때, 먹구름이 걷히고 서쪽 해가 비추었다. “무지개다!” 순간 길 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구 하늘 위, 건물들을 가로질러 커다란 아치 하나가 걸렸다.
나는 어느새 무지개를 향해 걷고 있었다. 왜인지 빛나는 끝을 따라가고 싶었다. 다다르진 못하겠지만, 그 끝에 단 한 번이라도 닿고 싶었다. 그러다 발걸음은 멈추었다. 그 찰나, 문득 깨달았다. 끝까지 가는 길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때로는 돌아서는 길에서도,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돌아간다는 것, 어쩌면 포기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방향을 틔우는 전환일 수 있다. 무지개 끝은 알 수 없지만, 그 아래에서 새로운 질문이 피어났다. 내가 원하는 건 끝에 닿는 일일까. 아니면 그 끝을 향해 걸었던 나의 시간, 그리고 돌아설 줄 아는 용기일까.
어렸을 때였다. 논과 밭, 개울과 언덕 너머, 마을을 가로질러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 끝엔 보물이 묻혀 있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진짜라고 믿었다. 무작정 달렸다.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다다라야 한다. 호미를 들고, 삽을 챙기고, 우리는 진지했다. 기어이 보물을 캐고야 말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무지개 끝은 분명 저기 어디쯤이었다. 갓 심은 벼의 초록과 농로의 흙길,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을 지나,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 무지개는 어느새 산 너머로 밀려나 있었다. 또다시 달렸다. 이번엔 꼭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무지개는 또다시 먼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결국 아이들이 하나둘씩 왔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홀로 남겨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보물이 거기 있을 텐데, 지금 돌아가면 영영 기회를 잃을지도 모를 텐데. 바보, 천치, 겁쟁이, 멍청이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산비둘기가 날았다. 부엉이가 울자 문득 겁이 났다. 나는 결국 돌아섰다. 자존심이 구겨졌다. 돌아서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들 틈에 섞여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씁쓸함과 마주해야 했다. 무언가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열정과 믿음이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혔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거운 건, 끝끝내 다다를 수 없는 것을 향해 계속 달리는 일 끝에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막연한 포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거였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무지개 끝을 좇는다. 누군가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끝을,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끝을, 누군가는 신념이나 정의 같은 추상적인 끝을 좇아 달린다. 처음에는 어디쯤일 것 같은 종착지를 향해 기쁘게 달려가지만, 조금만 다가가면 또 저 멀리 밀려나는 것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무지개 끝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포기’가 아닌 단념 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돌아선다는 건 포기가 아니다. 어쩌면 방향을 바꾸는 용기다. 한참 달려간 끝에 되돌아서는 그 걸음은, 처음 내디딘 걸음보다 훨씬 더 깊고 성숙한 무게를 가진 걸음 말이다.
어떤 일은 열심히 해도 도달하지 못한다. 때론 최선을 다했기에, 그래서 더욱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무지개 끝은 언제나 멀다. 우리가 다가가면 또 그만큼 멀어진다. 하지만 무지개를 향해 달렸던 시간, 기억, 추억,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이다. 거기엔 땀이 있고 숨이 있고, 기대가 있고 때론 실망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의 방향을 잡는 지점이 있다.
오늘 저녁, 짧은 비 끝에 무지개가 떴다. 아무리 보아도 닿을 수 없는 너머에 말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달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답고, 사라지기에 더 찬란한.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안간힘을 다 하다가도, 조용히 돌아서야 하는 것일지도.
이제는 무지개 끝보다, 그걸 가지기 위해 함께 달렸던 아이들의 웃음과, 젖은 논두렁과 호미와 삽을 들고 달려 나가던 나의 어린 심장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보물은 언제나 저기 있는 듯하지만, 어쩌면 여기, 이미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알게 된다. 때로는 돌아서는 데서 비로소 또 다른 길이 보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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