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모임에 대해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시작되었죠. 나는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리저리 끌려가고 휘둘리고 소용되다 팽게쳐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나를 함부로 가져다 쓴 사람들을 탓하고 큰 소리로 울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눈 앞에 ‘반짝’ 나타났다고 할까요.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책 모임이 시작하는 자리였지요. 처음보는 사람들이 자기 소개를 하고, 우리 모임의 이름을 수줍게 혹은 열성적으로 정하고, 첫 책을 정했어요. 모임의 이름은 ‘쉼표', 첫 책은 조지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였습니다.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올해부터 맡긴,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일어난, 아프게 하는 관계로부터 눈을 돌린, 성취를 향한 길에 숨이 가빴던 사람들이 샴페인 꼭지처럼 제 자리에서 '퐁!' 튀어나와 착지한 자리라고 할까요. 개개인의 서사를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의 이야기지만, 그날 우리에게는 열망과 우연과 필연이 묻어 있었을 겁니다.
또 훌쩍 떠났습니다. 코로나에 8개월 간 등교도 외출도 하지 못한 내 아이의 눈빛은 공허했고 동시에 어찌 돋았는지 모를 날 같은 것이 서려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를 부르는 눈은 사람을 갈급하다 꽉 쥐려고 생채기를 낼 것만 같았습니다. 가위손처럼요. 아이 마음을 채워줄 수도 없고 아이의 바램에 마냥 다치고 있을 그릇도 못된 저는 등교할 수 있는 시골 학교를 찾았습니다. 5일 후, 나고 자란 서울에서 제일 먼 제주로 왔지요.
책으로 만날 사람과 할 일이 정해지면 낯선 곳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온라인 세계를 뒤져 댓글을 달고, 신청서를 보내고, 한 개, 두 개, 세 개……다섯 개 째의 책모임에 들어갔습니다. 책 모임인 줄 알았는데 글쓰기 모임이었던 적도 있고, 책 값의 세 배가 넘는 참가비를 낸 적도 있고, 입 벙긋 하기가 불편한 적도 있고, 스타 유튜버를 만난 덕질 책모임도 있었습니다. 설렘과 체념의 기웃거림이 지루하던 중 오래 잠든 ‘쉼표’ 친구들 톡방에 말풍선을 띄웠습니다. ‘어제는 OOO 작가를 만났어.’
마주 뜬 말풍선들이 나도 알고 있는 작가라고, 또는 20대의 방황을 불러내 공명 해주었어요. 마음이 기쁘고 밝아졌습니다. 은은히 타오르는 모닥불의 붉은 온기를 쬔 것 처럼요. 모닥불 너머 발게진 얼굴로 나를 보아주는 사람을 본 것 처럼요. 모닥불! 우리의 책 읽기는 모닥불이었을거에요. 묵직한 책도, 유명한 작가도, 카페 인테리어도, 자기 말을 토해내는 핑계도 아니었을 겁니다. 한 권의 책이 우리 가운데 장작으로 놓여 지펴지는 동안 책 이야기가 비추이는 그 사람을 보고 들었습니다. 책 빛이 밝혀주는 것 말고는 서로를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돌아보라거나 좀 더 불 가까이 와보라거나 채근하지 않습니다. 다음 책, 다음 책으로 열화를 반복했지요. 붉었던 조각은 면적이 되고, 면적은 순서를 갖고, 한 사람의 서사를 들려줍니다. 이제는 서로 만나지 않을 때에도,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모닥불 너머에 마주 앉을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아, 나는 책을 찾은 게 아니라 불가에 같이 앉아줄 사람을 찾은 거로군요. 자기가 읽은 책 얘기를 낙수처럼 쏟아내는, 네 생각을 말해 보라고 핀조명을 쏘아대는, 읽은 책이 보루꾸라도 되는 냥 성벽을 쌓아올리는, 읽기가 벼슬이 되고 권위가 되는 자리 말고 글의 평등함을 알고 나누는 사람들을 원했던 겁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에요. 내가 찾아갈 곳을 알게 되어서, 마주 앉을 사람들이 떠올라서요.